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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풍경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을 얘기하라면 나는 신학기 바우어관 앞에서 만나는 자율과 명랑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신학기에 그곳에선 교내 동아리가 총출동하여 신입회원을 모집하는 행사를 벌인다. 동아리를 홍보하기 위한 선배들의 열정과 낯설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가는 신입생들의 호기심이 하나로 꿈틀거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동아리의 특성을 재치 있게 치장한 문구와 상징물들 그리고 모험과 도전의 게임으로 어울리는 선후배들의 흥청은 3월이 안겨주는 진귀한 풍경이다.
풍경은 하나같이 웃음으로 출렁여서 어지럽고 어수선하다. 학생들이 발산하는 생기는 화려하지 않으면서 환하다. 하얀 이를 드러내거나 소리를 지르고 또 입을 다물었으나 입 꼬리가 높이 올라간 몸짓들은 무질서하면서 자유롭다. 나는 이 모든 자율성과 명랑성의 실체를 ‘웃음’이라고 보고 싶다. 내게 이 웃음이 귀한 것은 마음의 근육을 푸는 힘이 거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마음의 나태를 전복시키는 힘이 거기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유를 차릴 겨를 없이 바쁘고 얽힌 일들로 피곤에 시달릴 때 스스로 화하게 순화되는 경험을 거기서 하게 되니 말이다. 어디 나 혼자뿐이겠는가? 이 길을 지나는 이들 누구든 몸과 마음이 자극을 받아 꿈틀거리는 체험을 했을 성 싶다. 나도 모르게 그 앞에 서서 웃음을 흘리고 그들로부터 에너지를 충전 받는 일이 해마다 일어나니 이것은 봄의 풍경이라기보다는 봄의 선물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마음을 주는 순간을, 나는 저 웃음의 시간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고, 거울 속에서 웃고 있는 나의 모습이 매우 부자연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에, 지금의 나에 대해 항거하는 시간이라 해석하고자 한다. 웃을 거리가 아니라 웃음을 웃어주는 일 자체를 잃어버린 나를 발견하는 서글픔이 저 풍경으로 시작해서 마음을 돌아보는 계기로 마무리 하게 되니, 지금 나도 모르게 흘리는 웃음에 그저 웃어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바우어관 앞길을 풍성하게 만드는 자유로운 웃음과 명랑한 웃음이 캠퍼스 곳곳으로 전염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1962년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다. 기숙학교에 다니던 12~18세의 여학생들이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전염병에 걸렸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웃음은 짧게는 몇 분에서 길게는 몇 시간동안 그칠 줄 몰랐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이 병적 웃음이 옆 사람들에게까지 전염된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3명의 여학생에게서 시작한 이 병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서 학교문을 닫아야 했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 학생들은 자기들의 마을에 이 전염병을 퍼뜨리는 역할을 하게 됐다. 마침내는 전 중앙아프리카에 있는 학생들에게까지 이 병을 걸리게 하였다.
내가 웃음을 잃어버린 원인은 익숙한 일상에 아무 저항을 하지 않는 점에 있지 않을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창출하기 위한 자율성보다는 평안하게 사는 것을 선택한 안주의 태도일 게다. 또 하나는 나도 모르게 취하는 진지한 태도가 더 가치 있다 여기는 데 있지 않을까. 그동안 써 온 글의 소재가 죽음이나 삶의 의미를 캐는 주제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러한 태도가 여유 있는 삶을, 자유로운 삶을 얽매었던 것일 게다.
웃음의 사회학을 살피다보면 위 예문과 같이 웃음이 전염되는 일화가 나온다. 웃음을 유발하는 뇌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하는데, 나는 웃음이 전염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에 관심이 있다. 스피노자가 말한 경탄, 희망, 신뢰, 자긍심 등 기쁨의 정서도 아마 ‘웃음’이 바탕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진단해 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웃음은 힘이 세다. 물론 잘 웃는 사람에게도 슬픔의 고통이 있을 게고 불안의 고통이 있을 게다. 어쩌면 즐거움보다는 불편하고 힘든 과정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의 웃음을 너와 우리에게 전염시키는 데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작용하는 데 그 실체 역시 웃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무엇이 마음을 움직여 웃음을 생성하는가?
아침마다 꽃들은 피어났어요
밤새 옆구리가 결리거나
겨드랑이가 쑤시거나
밤새 아픈 것들은
뜬눈으로 잠 한숨 못 자고
아침엔 손을 뻗쳐
무심코 만져지는 것이
무언가 아름다운 것인 줄 몰랐어요
이성복, 「무언가 아름다운 것」
나는 사실 그것을 알아챌 재간이 없다. 다만 밤새 육체를 괴롭히는 불안과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아름다움을 만져보는 이성복 시인의 시에서 힌트를 얻고자 한다. 나날을 통과하는 복합적인 정서에서 문득 피어나는 꽃이며 아름다운 그 무엇이라는 시인의 혜안을 나는 웃음이라는 실체로 대신하고 싶다. 이 과정은 자신에 대한 관심과 자신을 보살피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인내이면서 인고의 결과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무수히 피어나는 꽃은 나날의 고통의 승화이며 아름다움의 은유인 게다. 그 곳에서 마음은 웃음을 생성하는 근원이 되지 않을까.
웃음에는 자유와 사랑이 깃들어 있다. 서로에게 다가가 끌어주고 안아주는 동아리 모집 행위들에서도 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찍이 고통으로 들쑤시는 밤을 온 몸으로 감당하면서 책을 읽어내고, 삶에 대해 진진하게 고민해 온 선배들이 내민 용기의 손을 후배들이 붙잡는 아름다움이 바우어관 앞뜰의 정경이니 말이다. 봄을 잃어버렸다면 바우어관 앞뜰에 가서 봄의 씨앗인 웃음을 만나 볼 일이다. 웃음을 잃어버렸다면 웃음의 전염성을 믿고 웃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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