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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9년부터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현재 대학교 어학원에서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처음 복지관에서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시작한 한국어수업은 그 이듬해에 외국인근로자 대상 한국어수업으로 이어졌다. 매주 일요일에 무료 한국어수업을 6년간 진행하기도 했으며 외국인근로자들의 여건상, 현장학습이 어려운 것을 보고 매일 밤 2시간씩 4년간, 화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서로 힘들게 공부해서일까? 나는 한국어강사 경력 10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그들과 가족처럼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외국인근로자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나를 초대하기도 하는데 2016년에는 베트남제자의 초청으로 남편과 함께 하노이와 다낭을 다녀왔고 이번에는 인도네시아 제자들의 초청으로 인도네시아의 여러 도시를 4박 5일간 다녀왔다. 우리가 지불한 것은 비행기표 값과 약간의 선물비용이고 숙식비, 관광비는 제자들이 지불했다. 아름다운 경치와 역사적인 유적지를 찾아 가는 여행도 좋겠지만 한국어 강사로서 예전의 제자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는 것도 그 이상으로 보람 있는 일이다.
인도네시아 여행 첫날(2018.8.20.∽21) - 놀러 오라는 제자들의 말만 믿고 우리 부부는 무작정 수라바야 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호텔 예약을 한 채로, 20일 밤 11시 20분 인천 발 싱가폴 비행기에 올랐다. 5시간 30분간의 비행 끝에 싱가폴 창이국제공항에 새벽 4시40분에 도착했다. 6시 40분부터 gate가 열리기 때문에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수라바야 행 비행기를 기다려야 했다. 라운지에서는 환승 시간이 길어서인지 아예 이불까지 펴고 자는 사람들도 많았다. 몇 시간을 앉아 있어서인지 속이 더부룩하여 운동도 할 겸 면세점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요즘 계속 속이 안 좋다고 했더니 남편이 약국에 가서 위장약 몇 개를 사 주었다. 7시 20분경, 우리는 수라바야 행 비행기에 탑승하고 비행기는 예정대로 이륙하였다.
다시 3시간의 비행 후, 우리는 자카르타에 이어 인니 제2의 도시인 수라바야 공항에 21일 아침 9시 5분에 도착했다. 수하물 검사 후 바깥에 나왔는데 마중 나오기로 한 제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와이파이 사정이 좋지 않아 연락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유심은 15만 루피아라는데 제자들이 나타나면 물어보고 사야겠다는 생각에 잠시 더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어찌어찌하여 와이파이가 열려 카톡 전화로 연락했더니 제자들은 공항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베트남도 그랬었는데 동남아 국가들은 마중 나온 사람들이 공항 청사 내에 들어올 수 없는 것 같았다. 다른 장소에서 20여분 이상을 서로 기다린 것이었지만 어쨌든 만났으니 다행이었다.
공항 밖에는 3명이 마중 나와 있었는데 코이룰 씨와 그 아내, 그리고 리야디 씨였다. 코이룰과 리야디는 언제 봐도 착하디착한 얼굴이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었다. 코이룰의 아내 찌찌 씨는 코이룰이 한국에서 일하던 당시에 여행비자로 한 달 정도 한국에 머물다 가서 약간의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반가움에 잠시 인사를 나누고 우리 부부를 포함한 5명은 코이룰 차에 짐을 싣고 호텔로 출발하였다. 당연히 호텔로 가는 줄 알았는데 달려도 달려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물었더니 코이룰은 자기 동네에 있는 호텔에 간다고 하는 것이었다. 거기가 훨씬 좋다고 하는데 우리가 예약한 호텔은 비용이 환불 되지 않는 곳이라고 했더니 호텔 비는 코이룰이 우리에게 물어 주겠다고 했다. 어차피 차는 떠났고 우리는 길도 모르고 인도네시아 말도 모르는데다가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려서 돌이킬 수도 없었다. 결국 우리 부부는 예약해 둔 호텔 행을 포기하고 니들 맘대로 해보란 식으로 이곳 일정을 제자들에게 맡겨버리기로 하였다. 생각보다 도로는 잘 닦여 있었고 통행하는 차량도 많았다. 베트남과 비교했을 때 오토바이 수는 상대적으로 적고 차량은 더 많은 것 같았다. 코이룰은 분명히 수라바야 공항에서 자기 고향까지 가깝다고 말했는데 길은 멀기만 했다. 나는 고향까지 몇 시간 걸리는지를 묻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한국에 근로자로 와서 9년 8개월을 일만하다 돌아간 제자들은 지금은 30대 중반이 되어 대부분 가정을 이루고 형편도 살만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코이룰 씨는 고향에 돌아와서 현재 와이파이 설치사업을 한다고 했다. 직원이 6명으로 한 집에 와이파이를 설치하게 되면 가구당 매달 우리 돈 1만 원 정도를 받는다고 했다. 대학부근에 이발소도 운영하는데 밤낮 교대로 3명씩 6명이 일한단다. 총 12명의 직원을 거느린 명실상부 사장님인 것이다.
리야디 씨는 한국에서도 다른 사람들 사진만 찍어주던 사진사였는데 고향에 돌아온 지금도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단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 형님, 누님이 계시는 막내로 부친은 일흔이 넘으셨다고 한다. 집도 짓고 사진관도 완성했으니 곧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 다 한국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큰 집을 지었다고 한다. 리야디 씨는 코이룰 씨와 5시간 거리에 산다는데 코이룰 씨 집에서 공항까지 다시 4시간 거리를 달려왔으니 그 정성이 대단하고 고맙다.
우리 일행은 3시간을 달려 12시가 좀 넘은 시각에 어느 리조트에 도착했다. 코이룰 씨 집으로 가는 도중에 들른 '비제이 바쿠 리조트', 바쿠가 맹글로버 나무란 뜻이니 맹글로브 숲이 천혜의 생태계를 이룬 곳에 리조트가 자리를 잡은 곳이다. 이동로는 전부 맹글로버 숲이 우거진 갯벌 위에 생태이동로를 만들었고, 방갈로도 여러 채 있었다. 자연이 살아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인도네시아 기온이 32도라는데 바람도 선선하게 부는 것이 전혀 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저 방갈로에서 ‘한달간 살아보기’를 해보리라며 남편한테 큰소리를 쳤다.
몇 시간을 달려온 우리는 허기가 져서 우선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다양한 요리를 주문하고 밥을 기다리는 동안 코이룰과 리야디 씨는 유투브에 접속하여 음악을 틀고 노래를 불렀다. 신나는 한국 트로트 ‘무조건’을 선창한 코이룰 씨에 이어 리야드 씨는 인니노래, 영어 팝송 등을 불렀다. 주말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는 데 평일 점심이라 손님은 우리가 유일해 노래 부르기에 제격이었다. 우리는 생선구이와 요리들, 쌀과자 등으로 점심을 먹고 구불구불 산책로를 따라 산책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요즘은 해외 어딜 가나 한국 사람들로 북적이기 마련인데 여기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이어서 그런지 한국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시 차를 몰아 오후 5시 30분경에 우리는 코이룰 씨 동네에 도착했다. "집 부근에 호텔 있어요?" 라고 물으니 "있어요, 걱정 마세요."라고 했다. 하지만 코이룰이 우리를 데려간 곳은 동네에 있는 호텔이 아니라 자신의 집이었다. 호텔은 왜 안가느냐고 했더니 집이 호텔보다 좋으니 집에 묵으시는 게 더 좋겠단다. 아무튼 홀리데이인 수라바야 센터포인터 호텔 3박 예약(환불불가, 13만8천원)은 제자들 덕분(?)에 공중으로 날렸다.
코이룰 씨 집은 그냥 집이 아니라 저택이었다. 전체 규모는 뒷마당까지 이어져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었다. 차고가 있고, 정원에는 분수대, 정자도 있었다. 집 내부는 거실이 두 곳으로 나뉘어 각각 소파들이 놓여 있었고, 방이 셋, 기도실, 넓디넓은 식당이 있고 화장실과 샤워실은 외부에 위치해 있었다. 10년을 한국에서 먹고 자고 일만 하던 코이룰 씨는 한국이 아닌 제 고향에서는 우리가 평생 꿈꿔보지 못할 저택의 소유자였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아 집을 둘러보는 나는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집안에서는 코이룰 씨 아버지와 어머니, 막내 동생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버지는 인자한 모습에 전형적 무슬림 의상을 갖춘 신사로 56세, 어머니는 조용한 성품의 54세, 막내 여동생은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하는데 수줍음이 많은 귀여운 소녀였다. 부모님과 동생은 코이룰 씨 집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를 맞이하러 방문하셨다고 했다. 인니에서는 특이하게도 막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부모님 집까지 물려받는다고 하는데 코이룰 여동생도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으며 나중에는 부모님 집을 물려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부모님과 여동생은 부모님 댁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집 구경을 마치고 망고, 살롯, 빙번 과일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잠시 후에 집으로 돌아가셨던 어머니께서 부엌에서 부르셔서 가 보았더니 어느 샌가 식탁에 생선찌개에 새우튀김, 소고기 미트볼, 푸른 채소 데친 것 등 한상이 떡하니 차려져 있었다. 어머니가 집에서 미리 준비해서 가져온 저녁상인 듯 했는데 정성이 가득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인도네시아 학생들과 인니 음식을 먹어보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인니 음식을 먹게 되니 살짝 흥분되기도 했다. 생선찌개는 카레를 넣어서인지 전혀 비린내가 나지 않았고 음식들이 약간 매운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간이 세지는 않아서 부담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저녁 후 샤워하고 들어오니 낯선 손님들이 거실에 가득했다. 이모들, 사촌 여동생들, 동네 사람들이었다. 모두 한 마을에 사는데 한국 사람이 궁금해서 보러 왔다고 했다. 너나없이 만나는 사람들 모두 두 손으로 우리 손을 잡으며 인사를 했는데 젊은 사람들은 내 손을 끌어 자기 이마에 대기도 하였다. 우리가 너무 낯설어서일까?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대부분 조용하고 말이 없었다.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거나 크게 소리 내어 웃지도 않았다. 사진을 찍을 때도 살며시 다가와서 휴대폰을 내밀기만 했다. 바디랭기지로 통하는 표현을 제외하고 주로 코이룰 씨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양쪽에 전해 주었다. 코이룰의 말로는 한국은 어른이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것이 예의인데 인니는 나이에 상관없이 손을 내밀어 인사를 나눌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한국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 많은 외국인들이 코이룰처럼 한국에 일하러 온다는 이야기, 우리도 예전에는 부모님과 한집에서 살았지만 요즘은 대부분 따로 산다는 이야기, 그리고 요즘 한국에 일하러 가는 인니 사람들의 모집숫자가 부쩍 줄어서 한국에 가기 힘들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며 몇 시간을 놀다가 한 명 한 명씩 우리와 사진을 찍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고서도 우리는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고 고향에 돌아온 나의 옛 제자들의 안부를 묻느라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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