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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지글지글 끓었다. 행인이라곤 보이지 않는 한낮 거리에는 열기만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마당가 라일락 나무를 타고 오른 오이며 호박넝쿨이 축 늘어졌다, 꽃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국화도 화단에서 누렇게 떠갔다.
집안에만 든 채, 남편은 티비를 나는 책을 끼고 살았다. 티비에선 계곡과 바다로 떠나는 피서객들을 비춰주며 유난한 하늘에 대해 떠들었다.긴 더위는 몸이며 마음까지 지치게 했다. 예전처럼 더위와 정면으로 맞서거나 몸의 기력을 보충할 음식 만들 힘조차 잃었다. 그저 냉장고에 묵혀 있는 반찬 몇 가지로 끼니를 때우거나 달짝지근한 과일과 음료로 속을 달래며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더위, 작은 뜰에 홀로 서서 늘 거실을 넘겨다보고 있는 늙은 석류나무, 사방이 책으로 덮인 골방에 여승처럼 들어앉아 뭇 작가들과 소리없는 대화만 하는 아내, 거기서 거기인 똑같은 날들, 사무실에서건, 집에서건 할 일이 줄어든 남편은 그런 풍경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서재 문을 두드렸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렸다. 여름도 막바지에 이르렀는지 군데군데 가을빛이 물들고 있었다. 파란 하늘은 더 높아지고 맑았다. 도로 옆 과수원에는 붉게 물든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렸고, 수채화 물감을 뿌려놓은 듯 색색의 코스모스가 하늘거렸다. 들판의 벼이삭도 노란빛을 띠며 영글어갔다. 집에 있다가 야외로 나오니 솜털 구름마냥 마음이 몽실거리며 가벼웠다.
손님이라곤 우리 밖에 없는 식당 창가에 마주보고 앉았다. 음식을 주문한 후 남편을 바라보니 꼭 이불 속에 있다가 그대로 몸만 빠져나온 사람 같았다. 흰 티셔츠는 목이 늘어졌고, 남색 린넨 반바지는 구겨진 채였다. 동안이라 늙지 않을 것만 같았던 얼굴에는 팔자주름이 깊이 패었고, 양쪽 귀 뒤론 파뿌리 같은 흰 머리칼이 쭈뼛거렸다. 환한 미소와 아버지처럼 포근했던 따스함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찬찬히 살피는 내 눈길은 아랑곳없이 남편은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어디서나 왼손 손바닥에 휴대폰을 올려놓고 오른손 검지로 연신 두드리는 모습은 마지막 잔손질을 하는 수공예가 같았다. 아주 단순한 것을 가장 진지하게 하는 예술가의 모습이다. 놀이의 경지란 아마 그런 것일까.
먼 하늘 한편에 시커먼 구름 떼가 동편으로 몰려갔다. 그 먹구름 틈새로 칼날 같은 번갯불이 가끔 번쩍이는데, 태양빛이 정면으로 내리꽂히는 이쪽 하늘 사이로는 맑고 파란빛이 이따금 얼굴을 내밀었다가 숨곤 했다.
창문 너머로는 산들이 파초선 부대처럼 펼쳐졌다. 능선은 흠집 없이 섬섬이 이어지고, 팽팽한 등선은 젊어보였다. 키가 나란나란해진 나무들은 암록색 이불을 다같이 덮은 듯했다. 그 이불 안에서 가을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거나 곧 다가올 가을 파티에 어떤 옷을 입을지 턱을 괸 채 상상을 하는지도 몰랐다.
식당 창문에 가는 사선이 그어졌다,
“어, 뭐지?”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창에 바짝 댔다. 분명 빗방울이 날아와 창에 매달렸다.
“와아, 진짜 바다!”
빗금은 곧 굵은 빗방울로 와 부딪치더니 물방울 되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린 얼굴을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양동이로 퍼붓듯 흠뿍 왔으면 좋겠다. 그치?”
갑자기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혹...?’
눈길을 남편 등에 바짝 붙였다. 평소 나의 소망은 비가 억수로 퍼붓는 날, 예전의 그처럼. 주차장으로 간 남편은 차 트렁크에서 우산을 꺼내더니 잽싸게 뛰어왔다. 골프우산 같이 크고 긴 우산을 의자 옆에 보초병처럼 세워두고 밥만 먹었다.
‘에구, 이 남자 뭐람!’
가을비 내리던 어느 날, 내 자취방 서린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사랑해’ 써놓고 슬픈 눈길 보내던 그 남자, 모진 말을 쏟아 붓고 나 혼자 버스 타고 떠나온 빗길을 우산도 없이 처벅처벅 걸어 따라오던 그 남자, 잘 하지도 못하는 술 한 잔 걸치고 자갈밭에 철퍼덕 앉아 소리 내어 울던 그 남자, 동네 어귀 전봇대 아래 서서, 담배를 문 채 종일 기다리던 그 남자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남편 몸에서 쏙 빠져나간 그 남자.
남편은 무겁고 긴 여름 길을 오르기만 하다가 지쳐버린 것일까. 나이 듦의 현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지. 다시 깨어나라고 외쳐야 할지 모르겠다.
하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으니까. 감각과 물질은 물론이고 고귀한 정신도 언젠가는 무언가와 희석되기도 하고 그러다가 흐미해지면서 사라지고 마는 것을.
감각이나 정신은 또 다른 감각이나 정신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의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힘, 그것 앞에서 우린 그저 또 다른 감각과 정신의 충격요법을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일임을. 그래야만 그나마 안주에서 깨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게 아닐까.
휴대폰에만 몰두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그 남자는 어디 갔느냐고...’
지칠 줄 모르도록 무덥기만 했던 여름과 함께 사라져버린 가을남자를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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