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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전역을 불과 몇 달 남겨둔 소위 말년 병장이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년에는 몸을 사리는 게 상책이다. 그렇다보니 마지막훈련에 임하는 나의 마음은 예전과는 달리 약간은 불안했다. 훈련을 하면서 늘 힘든 것은 예상 밖의 상황에 처할 때이다. 훈련이 준비한 대로 된다면 그리 힘들 것도 없을 것이다. 육군 포병대대 무전 반에 근무하던 나는 숱한 훈련을 겪으면서도 큰 사고 없이 잘 버텨왔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박스카를 타고 가서 무전망을 확립한 후 무전대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후임병들이 많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편했다. 훈련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별 탈 없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훈련이 끝나기 이틀 전날, 나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박스카에서 무전대기를 하고 있었다. 훈련이 이틀밖에 남지 않아서 그런지 다들 초심을 잃고 약간 군기가 헤이 해져 있었다. 박스카가 3대에 무전병이 각각 2명씩 있었고, 중간에는 유선가설병들이 대기하는 D형 텐트가 쳐져 있었다. 유선병 서병철 상병이 박스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병장님, 오늘밤에 한잔하시겠습니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지금까지 군복무를 하면서 술이라고는 구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은 훈련 중이 아닌가.
“뭔 소리야? 서상병.”
“낮에 가설하다가 구멍가게 하나를 보았습니다. 어두워지면 제가 소주 몇 병 사오려 합니다. 이제 전역도 얼마 안 남으셨는데, 멋진 추억 만들어야지 않습니까?”
솔깃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나에겐 청천벽력 같은 얘기였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할 판이다. 그러니 이런 제의는 그리 달갑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화가 났다. 그런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 후임들에게 인간적인 선임으로 인정받던 터이라, 편하게 생각해서 혹은 진심으로 나를 위해 한 얘기 같은데. 몹시 난감했다. 그때 나와 함께 근무하고 있던 정대윤 상병이 끼어들었다.
“야, 군대에서 술을 다 먹어보게 될 줄이야! 이병장님 오늘밤 한잔하십시다.”
“술이라니 사족을 못 쓰는구나!
서상병이 맞장구를 쳤다. 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도 모두 술 생각이 간절하다고 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계속된 훈련은 물론 고된 군 생활에 염증이 날 만도 하다.
“그럼 조금만 사도록 해. 난 별로 생각 없지만. 하여튼 조심해라. 걸리면 작살나는 거 알지?”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군대 생활 헛 한 거 아닙니다. 저도 다 계획이 있습니다.”
서상병의 대답 또한 아직 철없는 얘기로만 들렸다. 이윽고 밤이 찾아왔고 모두 텐트에 모여 취침준비를 하고 있었다. 후임병들은 모두 취침하고 몇몇 선임병들만이 야릇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드디어 서상병의 방독면가방에서 소주 몇 병과 안주로 보이는 쥐포 몇 마리가 나왔다.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무슨 수라상을 본 양 입에 침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반합뚜껑에다가 소주를 따르고 마셨다. 나는 누워있을 수도 없어 그냥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병장님 한 잔 받으십시오.”
“난 원래 술 안 좋아하잖아.”
“에이, 딱 한잔도 못합니까? 우리가 언제 다시 이곳에서 술을 마셔보겠습니까.”
“그럼, 조금만 따라봐.”
취기가 도는지 친근히 구는 서상병의 제의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주위 상황을 보니 무사히 잘 넘어 갈 것 같기도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술은 삽시간에 비워지고 말았다. 모두가 다시 못 올 이 순간을 못내 아쉬워하며 마지막 잔을 비웠다. 우리는 계급을 떠나 인간적으로 약간의 담소를 나눈 뒤 초번 순찰이 돌기 전에 취침에 들어갔다. 나는 왠지 불안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기상과 동시에 다시 분주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침낭을 말고 군장을 챙기고 아침점호를 받기 위해 상황실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 순간.
“내 방독면 어디 갔어? 야 이 새끼들아, 내 방독면 찾아봐.”
서상병의 신경질적인 말에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결국 방독면을 찾지 못한 서상병은 후임병의 방독면을 집어 들고 아침점호에 참석했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에 없던 일이 일어났다. 일직사령이 아침점호를 취하고 있는 도중에 작전 장교가 끼어든 것이었다.
“모두들 계속된 훈련에 수고가 많다. 무사히 귀대할 때까지 모두가 긴장 늦추지 말길 바란다.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특별히 군장검사를 실시하겠다.”
지겨운 군장검사 끝에 방독면이 없는 이등병하나가 상황실로 끌려 들어갔다. 서상병이 방독면을 아무거나 주워갔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텐트로 돌아왔을 때 모두가 말이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후임병들은 갑자기 살벌해진 분위기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그때 서상병이 나를 잠깐 불러냈다. 담배를 한 대 권하며 그도 한 대 물었다.
“일이 잘못되고 말았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자세히 설명해봐.”
“김하사 말로는 어젯밤 작전장교가 순찰을 돌다가 우리 텐트를 열었는데. 술 냄새가 풍겼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뒤지다가 제 방독면에서 소주병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가져갔답니다. 그래서 예정에 없던 군장검사를 한 겁니다. 모든 걸 제가 책임질 테니, 이병장님은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전역도 얼마 안 남았지 않습니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분대장인 내가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나 또한 썩 내키지 않았던 일이었을 뿐더러 전역을 코앞에 두고 있어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족히 영창을 각오해야 될 판이었다. 며칠 뒤 훈련을 마치고 대대로 돌아왔다. 모두가 불안한 마음으로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자체조사 끝에 뜻밖에도 직속 후임인 정대윤 상병이 주범으로 판명이 나고 말았다. 서상병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며 자수를 하겠다고 했지만, 입대동기인 정상병 또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됐어. 나 하나만 고생하면 끝이야. 이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생각하자. 네가 자수하면 일이 더 복잡하게 된다. 까딱하면 여러 사람 잡는다고. 특히 이병장님은 전역이 낼모레야. 나 역시 마셨으니 억울하지 않아.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정말 미치겠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냐?”
서 상병 또한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후 즉결판정이 나서 바로 헌병대에 끌려 갈 줄 알았던 정상병에게 공교롭게도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영창이란 곳을 처음 경험하게 되는 정상병에게는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오히려 고역이었다. 평소 털털하고 화끈하기로 유명한 정상병이지만, 요 며칠 말수가 극히 줄었다. 그의 그런 변화에 누가 말을 붙이기도 미안했다. 그런데 한 수 더 떠서 휴가자 명단에 정상병이 올라간 것이다. 정기휴가를 아직 갔다 오지 않은 터라 가야 할 때는 훨씬 지났지만, 이 상황에서 휴가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행정병에게 물어보니 징계에 관한 상부의 언급은 아직 없고, 휴가는 명단이 올라간 이상 갈 것이라 했다. 드디어 휴가자 출발 날이 왔고 정상병은 울며 겨자 먹기로 휴가를 떠났다. 즐거워야할 휴가가 그에게는 오히려 큰 짐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점점 군 생활에 회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끝까지 그 일을 막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면 휴가를 미루어야 했다. 하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일으킬 필요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갇혀버린 것이다.’
나는 점점 무력해졌고 또한 초조해졌다. 모두가 나에게 모든 죄를 책임지고 대신 영창에 가라고 라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잘 버텨왔는데. 유종의 미를 거둘 수가 있었는데.
‘아, 이젠 다 틀리고 말았구나! 오, 이젠 남은 복무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심한 죄책감이 나의 수면을 방해했다.
그 뒤 정상병이 휴가를 마치고 귀대했다. 여전히 어두운 낯으로 나에게 복귀신고를 했다.
“잘 갔다 왔어?”
“예, 그렇습니다.”
그의 힘없는 대답에 더 이상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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