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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또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그 날은 대대장간담회가 있는 날이라 점심을 먹고 A급 전투복과 전투화를 착용 후 간담회장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한 다른 포대 분대장들이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남은 관계로 우리 포대 분대장들도 담배를 한 대씩 피웠다.
“오늘은 어떤 말이 나올까?”
“뭐, 별거 있겠냐? 그게 그거지.”
“그래도 신임대대장이라 조금 다르지 않을까?”
“우리 하는 일이야 늘 똑같지 뭐.”
대대장 간담회는 늘 형식적으로 끝나버리기 일쑤였다. 대대장이 말하고 분대장들은 그저 듣기만 했다. 가끔 안건을 내는 분대장도 있었지만, 그것이 실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 모두들 눈치만 살피다가 돌아오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이번에는 신임 대대장의 첫 간담회라 혹시나 하고 안건을 준비한 분대장도 더러 있었다.
“분대장들 반가워요. 대대장이 바뀌고 처음 간담회군요. 저는 여러분들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어디 이 자리에서 우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대대장의 인사가 끝나고 당번병으로부터 음료수가 하나씩 주어졌다. 인원은 스무 명 안팎이었다. 대대장은 자신의 경력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설명하면서 간혹 전에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분대장들은 모두 웃기도 하고 손뼉을 치기도 하였다.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어 갔다. 아무래도 신임 대대장이라 그런지 전임 대대장이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연출되었다. 슬슬 마칠 때가 되어갈 무렵 대대장은 여느 대대장처럼 분대장들의 건의사항을 듣고자 했다. 이 시간만 되면 모두가 침묵하기 때문에 대대장이 되레 무안해서 일일이 분대장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분대장들은 대개 얼굴이 용암처럼 벌게지면서 당혹스러워 한다.
“나는 여기 온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몰라요. 여러분들이 하나하나 가르쳐줘야 돼요. 그러니 이렇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지 말고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어서 말해보세요.”
예전처럼 모두가 침묵을 지키자 대대장이 먼저 한마디 했다. 전임 대대장에 비해 한층 부드러운 태도에 안심한 듯 몇몇 분대장들이 한마디씩 했다. 전역을 한 달 앞둔 병사는 사회적응을 위해 머리를 기르게 해 달라, 사제 전투모를 쓰게 해달라는 등 대대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었다. 전임 대대장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이런 건의사항에도 신임 대대장은 미소를 띠며 묵묵히 듣고는 고려해보겠다고 답했다. 다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내 머릿속에는 이번 음주사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처벌이 내려지지 않은 이 사건의 결말이 나를 애달게 만들었다.
“더 이상 건의사항이 없으면 이제 그만 마칠까요?
나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급속도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손에는 땀이 배였고 심장은 요동을 쳤고 시야는 점점 흐릿해졌다.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용기를 내야 했다.
“존경하는 대대장님! 저는 본부포대 무전분대장 이동근입니다. 먼저 대대장님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아마 우리 대대가 더욱 발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이렇게 일어섰습니다. 대대장님은 이번 훈련기간 중 본부포대에서 발생한 음주사건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아, 그거, 안 그래도 작전장교로부터 보고 받았네.”
“그러면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실 계획이십니까?”
“어, 지금 대대장도 그것 때문에 무척 고민 중이라네. 취임하자마자 이런 큰 일이 터지다니! 지금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고 있는 중인데…. 뭐, 무전분대장에게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일개 사병이 뭘 알겠습니까만은, 사건의 주범인 정상병은 저의 직속 후임입니다. 평소 주특기에 능하고 포대 작업에서도 뛰어난 사병인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가담이 되어서 몹시 가슴이 아픕니다. 아울러 분대장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입니다만, 이번 사건의 처벌을 무마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미친 짓이었다. 대대장을 상대로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하기 조차 힘든 일이었다. 순간 간담회장은 서늘해졌다. 모두가 나에게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대대장은 순간 눈에 경련이 일었다. 하지만 대대장이 이런 자리에서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전분대장,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당연하지 않나? 그리고 이번 사건은 아주 엄격 하게 다루어야 할 사안이라는 것쯤은 자네도 잘 알 텐데.”
“그렇다면 처벌을 미루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건 이후 매사에 적극적이던 정상병은 아예 말을 잃었습니다.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정상병은 정기휴가까지 다녀왔습니다. 그의 휴가는 보나마나 비참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근 20일이 지난 지금 포대에서는 처벌에 관한 아무 기별조차 없습니다. 그동안 정상병은 어쩌면 영창에 있는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받았을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으로 벌은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같이 생활하는 제가 그 점은 누구보다 잘 압니다.”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손이 심하게 떨리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이번 사건을 무마시켜주면 이것이 선례가 되어 다음에 죄 지은 병사들은 너도나도 사면을 원한다면 어떻게 될까?”
대대장은 회심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런 일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것은 대대장님을 비롯해 여기 있는 분대장들만 아 는 일입니다. 지금 포대에서조차 이 사건은 점점 잊히고 있습니다. 누구하나 말을 꺼내는 이도 없습니다. 저 또한 이제 곧 전역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군 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저의 군복무 기간 중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 될 것입니다.”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분대장들에게 묻겠네. 만약 이 대대장이 용서를 해준다면 분대장들은 이 일을 비밀로 할 수 있겠나? 그리고 한 가지 더. 다음부터 이런 말조차 꺼내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는가?”
가제는 게 편이다. 내가 누구인지 정상병이 누군지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었지만 전원이 “예 그렇습니다.”라고 동의했다.
대대장은 더 이상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좋다. 그럼 이 자리에서 이번 사건은 대대장의 권한으로 무마시켜줄 것을 약속한다.”
그때 대대장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았고 옆에 있던 우리 포대 분대장들이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봐주었다. 다른 포대 분대장들도 모두 자기 일 인양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전역의 날이 왔다. 그 전날까지 말이 없던 정상병이 나를 위병소까지 바래다주었다.
“고맙습니다. 이병장님.”
“고맙기는”
그렇게 우리는 위병소에서 아쉬운 작별을 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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