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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니여행 넷째 날(2018.8.24.) - 아침 5시 40분경, 리야디, 코이룰과 함께 이틀 전에 서자바에서 동자바인 수라바야까지 비행기로 날아 온 누라를 버스터미널에 데려다 주러 나갔다.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출발시간이 되어 슬퍼할 사이도 없이 포옹 한번 하고 헤어져야 했다. 이제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누라가 출발하자 곧 다시 아침에 온다고 했던 에리 씨를 마중하러 다른 시외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예상보다 에리 씨 버스가 늦는 바람에 우리는 인근에 있는 공원에 들러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작은 공원은 오래 된 열대 나무들로 깨끗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아직 6시 무렵인데도 공원은 유치원생들과 아이들을 따라 온 부모들로 가득했다. 유치원마다 운동복 같은 유니폼을 입고 머리띠를 두른 채 손에는 우리나라 초등학생들 운동회 때나 볼 수 있는 도구들을 들고 있었다. 차림새로 보면 영락없이 체조대회라도 나온 듯이 보였는데 리야디 말로는 공원 바로 앞 관청을 방문하러 온 일행들이란다. 세계 어느 나라든 모든 어린이들은 한결같이 귀엽고 예쁘다. 다양한 차림의 아이들을 구경하면서 사진도 찍고 공원에서 파는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다. 열대과일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이었는데 맛이 좋았다. 관청 입구에 서 있는 공무원들도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운 베트남 ‘공안’에 비하면 인니 공무원들은 참 선량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구경하는 사이에 에리 씨가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공원을 뒤로 한 채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한국에서 근로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지 4년 만에 만난 에리 씨는 예전보다 홀쭉한 모습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1년만인 3년 전에 인니 공무원과 결혼했다고 한다. 손에는 에리 씨 동네에서만 판다는 노란색 두부와 선생님한테 줄 젓갈을 들고 있었다. 인니에서 공무원이라면 괜찮은 직업에 속한다는데 남편과 별개로 에리 씨도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차 안에서 에리 씨의 사는 이야기를 들으며 리야디 씨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터미널에 간 사이에 남편은 리야디 씨 형과 함께 부친댁을 방문했다고 한다. 불과 20~30m 부근이었는데 도착하기 전까지 여기는 이모집이고, 여기는 삼촌집이고 하는 식으로 가족공동체와 다름없는 마을을 소개해 줬다고 한다. 부친 집에 도착하니, 막내삼촌이 맞아주었는데 2003년까지 4년간 미국에서 일했다고 해서 서로 서툰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셋인데 아직 본인 나이가 어려서 얼마나 더 낳을지 모른다는 말을 했다면서 남편이 웃었다. 미국에서는 뉴욕 인근, 캘리포니아 LA에서도 근무하였다고 한다. 우리 가족들도 예전에 미국생활을 한 적이 있어서 함께 미국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단다. 막내삼촌의 집에서 커피에 크리스피 과자류, 포도를 대접받았는데 인니에서는 어느 집엘 가나 항상 크리스피 과자가 있는 것이 신기했다고 한다.
우리는 리야디 씨 누나, 형수들이 장만한 아침을 나낭 씨 가족, 에리 씨와 함께 먹었다. 올해 일흔 네 살인 리야디 씨 아버지는 연세에 비해 정정하셨다. 말씀이 없는 과묵한 성격이시지만 남들이 뭘 필요로 하는지 살펴보시고는 살며시 갖다 놓으시는 배려 깊은 분이셨다. 조용하고 다정한 리야디 씨의 성품이 바로 부친을 닮은 것 같다. 어머니는 리야디 씨가 한국 오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어머니도 참 좋으신 분이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식사를 마친 뒤 리야디 씨의 안내로 작별 촬영에 들어갔다. 리야디 씨는 한국에 있을 때도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 우리가 놀러갈 때면 항상 사진사를 자청했다. 고향에 돌아가서 사진관을 운영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집안 어디에도 별도의 건물이 보이지 않아 의아해 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먹고 마시던 거실이 바로 스튜디오였던 것이다. 예쁘게 꾸며진 공간에서 우리는 리야디 씨 가족과 우리 부부, 전체 사진, 형님 가족과 우리 부부, 누님 가족과 우리 부부, 그리고 나낭 가족, 에리 씨, 여성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등등 참으로 많은 작품사진을 찍었다. 나는 리야디에게 우리 사진을 꼭 사진관에 걸어둬야 한다고 약속을 받았다. 앞으로 사진관이 성황을 이루기를 기원한다.
사진을 찍고 제일 먼저 나낭 씨 가족이 고향 길에 올랐다. 예전에 나낭 씨는 한국에서 화상통화로 나에게서 한국어를 배웠었다. 외국인근로자들은 일주일에 한번, 일요일밖에 자유 시간이 없는데 그마저도 거리가 멀어서 공부하러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돕기 위해 화상한국어 수업을 시도했는데 나낭 씨는 1년 동안 한 주도 빠짐없이 수업에 참석했었다. 그 후 대학교 어학당에서 유학생을 상대로 하는 한국어 수업과 한국어 박사과정을 밟느라 4년간 진행하던 수업을 그만두었지만 화상수업 덕에 나는 많은 근로자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나랑 수업을 했던 나낭 씨는 코이룰과 리야디 씨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성실하게 생활한 바른생활 범생이였다. 건강관리나 체중조절도 철저해서 매일 사과를 한 알씩 먹는 습성이 있었는데 나낭 씨가 한국을 떠난 이후로도 나는 사과를 볼 때면 항상 나낭 씨 생각이 났던 것이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도 할 수 없는 작별이었다. 제자들 한 명 한 명 헤어질 때마다 가슴이 아파왔다.
9시 40분. 어제 우리를 위해 집안 청소와 요리를 맡아주셨던 리야드 씨의 아버지, 형, 누나 가족들, 엄마 동생인 이모 가족도 작별인사를 위해 집을 방문했다. 한 집에 사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마을주민들로 이웃에 옹기종기 함께 살고 있어서 마을전체가 끈끈한 혈연공동체인 셈이다. 우리는 모두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리야디, 코이룰, 에리 씨와 함께 차를 타고 리야디 씨의 고향 Kabupaten Tulungalung을 떠났다. 10여분 뒤 큰 가게에 들렀는데 사려 깊은 리야디 씨가 공항 면세점보다 싼 이곳에서 우리가 필요한 물건을 사게 하려고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좀 살라치면 제자들이 계산대에 뛰어오곤 해서 가급적 작은 물건들로 최소한의 선물꾸러미를 꾸려야 했다. 10만 루피아 7장 정도를 주고 거스름돈을 받았으니 한 6만 원 정도 들었을 것이다.
마지막 점심을 공항 인근에서 먹고 4시 20분경 수라바야 주안다공항(Juanda Airport)에 도착했다. 코이룰 씨가 차를 파킹한 후 공항 입구에 오자마자 우리는 진짜 마지막 작별의 사진을 찍고 아쉬운 이별을 했다. 나는 다시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를 사랑하는 제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꼭 가슴으로 안아주며 마음을 전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생사이지만 항상 그 시간이 오면 아쉽고 애잔하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지만 이번에 우리가 이렇게 만났듯이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으리라. 남은 인니화와 한화 10만 원씩을 보태서 코이룰과 리야디 씨에게 차비로 전한 것이 그나마 우리가 제자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한 전부였다. 우리 부부를 초대해주고 환영해주고 대접해준 나의 인도네시아 제자들, 코이룰, 리야디, 이맘, 누라, 수찌아니, 나낭, 에리, 하킴, 해피, 판냐, 그리고 가족분들 참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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