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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일 : 2019년 9월 25일

#1 선 - “내가 원래 선을 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데”

        <기생충>은 한국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2019년 5월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위상에 걸맞게 <기생충>의 관객수는 너끈히 천만을 돌파했고, 영화에 대한 평도 풍부하고 다양하게 쏟아져 나왔다. 그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주제는 감독의 제작노트에도 언급되었듯 아마도 “공생이 어려워진 각박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한 것이 아닐까? “내가 원래 선을 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데”라는 말을 하는 박사장 밑에서 기사노릇을 하는 기택의 상황처럼 ‘선 넘기’가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에 관한 담론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주제가 그다지 낯설지 않다. 봉준호는 전작 <설국열차>에서 “부와 권력에 따라 서열화된 우리 시대 계급 문제”를 열차 ‘칸’에 비유한 바 있고, 그것을 다시 <기생충>에서 ‘선’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칸’은 계급 구분을 수평적으로 형상화한 것이고, ‘선’은 계급 구분을 ‘계단 오르기’처럼 수직적으로 개념 잡은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계급과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다 같이 공생하며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하는 봉준호의 문제의식은 최소한 이 두 편, <기생충>과 <설국열차>에 있어서만큼은 봉준호의 화두가 된다. 여기까지는 <기생충>의 표면적 주제에 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부의 층차가 한눈에 드러나는 박사장과 기택의 집 사진이다.
   

#2 냄새 - ‘무말랭이, 행주 삶는 냄새,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

        영화의 표면적 주제 외에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는 소스들은 적지 않다. 이 중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기택이 박사장을 살인하는 장면에 대한 관람자들의 질문이다. 기택은 ‘분노의 캐릭터’가 아닌데 왜 박사장을 죽였는지, “기정이의 죽음은 금방 이해가 됐는데, 왜 박사장이 죽어야 했는지”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기택의 살인을 납득할 수 없는 이유에는 행위의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영화의 핍진성을 충분히 고려치 않은 감독의 어설픔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들이 섞여있는 듯하다. 필자에게 이러한 질문에 응답하고 싶은 욕구가 발동했다. 우선 기택이 박사장을 왜 죽였을까를 잘 탐색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전후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래의 사진을 참고해서 살인이 일어난 당시의 전후 상황을 살펴보자.
   
    위 사진들의 시간적 배경은 인디언을 좋아하는 박사장네 막내 다송이의 생일 파티가 열리는 날이다. 갑자기 지하실에서 정원으로 나온 지하실 남자 근세는 기정이를 칼로 죽인다. 이 살인은 기택의 가족이 근세 자신의 아내를 죽인 데에 대한 복수로 읽어야 한다. 그 다음 충숙은 자신의 딸 기정이를 죽인 근세를 파티장에 있던 소세지꽂이로 죽인다. 죽은 근세를 보고 박사장의 아들 다송이가 기절하는데 이에 박사장은 살해당한 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기절한 다송을 병원에 데려가는 데에만 신경을 쓴다. 박사장은 기택에게 차 키를 달라고 소리치고, 이에 기택은 박사장에게 차 키를 건네려고 던지는데 차 키는 죽어가는 근세의 몸 아래 깔리게 된다. 위 사진들은 박사장이 근세에게 다가가 차 키를 꺼내려는 순간에 연출되는 장면들이다.
    이후 근세의 몸에 깔린 차 키를 꺼내는 박사장을 바라보던 기택은 달려가 박사장을 살해한다. 분명 충동적으로 일어난 살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박사장을 살해하도록 기택을 자극시켰을까? 여기에는 박사장의 냄새에 대한 태도가 주요한 코드로 작동된다. 사실 이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에 기택에게 냄새에 대한 기억이 하나 있다. 기택은 과거 우연히 박사장이 자신의 아내에게 운전기사(기택)의 몸에서 ‘무말랭이, 행주 삶는 냄새,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 같은 게 난다고 하는 말을 엿들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는 그것이 특별히 기택의 심리를 흔들어 놓은 것 같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기택은 근세 냄새 때문에 코를 막고 인상을 찡그리는 박사장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에게 냄새난다고 말했던 박사장의 목소리가 떠올랐을지 모른다. 박사장의 태도로 유추해볼 때 박사장에게 그 냄새나는 대상은 불쾌의 의미를 넘어 혐오스러운 대상에 가까워 보인다. 기생충처럼 말이다.

#3 기택은 왜 박사장을 죽였을까? - 수치심, 억압된 것의 회귀, 투사적 동일시

    그렇다면 기택은 왜 박사장을 죽였을까? 근세의 냄새 때문에 코를 막고 인상을 찡그리는 박사장을 보고 분노를 느껴서 그랬을까? 그러나 그동안 기택이 보여준 이미지는 ‘분노의 캐릭터’가 아니지 않았던가? 박사장이 기택 자신에게 냄새가 난다고 했을 때도 분노하거나 그러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기택은 정의감과 도덕심이 강한 성격도 아니다. 기택의 아들은 위조한 명문대 재학증명서를 들고 과외 면접을 보러 가면서 “아버지 전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할 때, 기택은 아들을 훈계하기는커녕 “아들아 네가 자랑스럽다”고까지 말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기택은 수치심을 못 느낄 정도로 뻔뻔스러운 인간인 것인가?

    “뻔뻔스러움(shamelessness)은 수치심의 부재라기보다는 수치심에 대한 방어이다.”

    그렇다. 기택은 수치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수치심 정서를 방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부되고, 조롱당하고, 노출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한다는 고통스런 정서를 가리키는 수치심”에는 당혹스러움, 굴욕감, 치욕, 불명예 등이 포함된다. 기택은 자신이 냄새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분명 당혹스러움과 굴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의식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무의식에 축적되는데, 이는 이후 끊임없이 의식으로의 진입을 시도한다. 즉 ‘억압된 것의 회귀’인 것이다. 그러나 억압된 것은 의식으로의 진입 시 그대로 올라오지 못하고 우회적 경로를 이용한다. 즉, 이동, 압축, 전환 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기택이 근세의 냄새 때문에 인상을 찡그리는 박사장을 보는 순간은 억압된 것이 회귀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억압된 것의 회귀는 증상이나 말실수를 통해 되돌아오는데, 기택의 경우에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는 증상을 통해 억압된 것이 회귀하고 있다. 우리는 이 증상을 통하여 억압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심리적 갈등은 다른 증상으로 치환되면서 그 갈등의 해결을 시도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박사장이 기택 자신을 보고 코를 막고 인상을 찡그리지는 않지 않았는가? 또 이러한 박사장의 태도는 근세를 향한 것이 아니던가? 이 당시 근세는 자신의 딸 기정이를 죽이고 바로 아내 충숙에 의해 죽임을 당한 직후인데도 기택은 가족의 입장과 상관없이 근세에 대한 박사장의 태도를 보고 박사장을 죽이러 뛰어간 것이다. 이러한 기택의 태도는 기택이 근세에게 투사가 일어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투사는 ‘거부된 자신의 부분을 자신 밖으로 추방하여 타자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택은 자기가 느끼는 수치심을 근세에게 위치시킨다. 그 다음 기택은 근세와 동일시된다. 즉 “자신의 내적 세계를 외적 대상에게 쏟아 놓고 그 대상을 재내면화하는 판타지 과정”인 투사적 동일시가 일어난 것이다. 결국 박사장을 죽일 때의 기택은 기택이 아닌 것이다. 굴욕감을 느끼는 근세의 심리적 대리자, 즉 근세가 되어 박사장을 죽이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사건 이후 근세와 동일시된 기택은 근세가 4년간 머물렀던 박사장 집 지하실로 들어가 생활하게 된다. 그전에 근세가 그랬던 것처럼 모스부호로 세상을 향해 신호를 보내면서.


    * 감독은 기택이 박사장을 죽이는 장면을 왜 설정했을까? 어느 평자들의 생각처럼 감독의 어설픔의 결과일까? 필자는 평소 너무 디테일하다고 해서 ‘봉테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봉준호 감독이 충분히 스토리의 핍진성을 고려했을 것이라는 쪽에 한 표를 던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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