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보기
* 발행일 : 2019년 9월 25일


   한국어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면서, 외국인 제자의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 여느 유명한 관광지를 여행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일이 되었다. 두 차례의 하노이 방문과 인도네시아 방문에 이어, 이번에는 베트남에서 가장 큰 응에안(Nghe An) 성을 찾았다. 응에안은 히업, 아이・타이 자매, 그리고 아직 귀국하지 않은 진 씨가 사는 고향이다. 이번에는 이들의 집을 방문하고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의 생가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베트남 다낭에서 산 지 어언 5개월이 되는 2019년 8월 6일(화) 저녁, 용기 있게 왕복 1천km, 2천 5백리 길을 야간버스를 타고 떠났다. 그리고 9시간 동안 야간버스 안에서 쪽잠을 잔 끝에 히업 씨의 고향, 타이화(Thai Hoa)에 내렸다. 히업 씨는 한국에서 근로자로 5년간 일을 하고 불과 한 달 전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부분 10여 년을 한국에서 근로하는 다른 외국인근로자와 달리 히업 씨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선생님이 자신의 집에 방문할 것을 희망했다.
    히업 씨의 고향은 타이화에서도 시골이었다. 시외버스가 정차하는 터미널이 없다보니 차장이 주소를 보고 가까운 도로변에 내려주었다. 히업 씨는 동생과 함께 각각 오토바이를 타고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터미널은 없지만 시외버스가 정차하는 장소가 따로 있고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곳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각자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3km 떨어진 히업 씨의 집으로 향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오토바이, 하지만 베트남에 사는 동안 오토바이는 더 이상 낯선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좌우로 논이 넓게 펼쳐져 있다. 오토바이는 길 위를 점유한 물소와 염소들을 능숙하게 피하며 나아갔다.
    집에 도착하니 히업 씨의 부모님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아버님은 62세, 어머님은 52세이시다. 집안의 맏이인 히업 씨 아래로 남동생이 둘 있다고 한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곧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 식탁이 따로 없어서 돗자리를 바닥에 깔고 차린 아침 식사는 정갈했다. 쌀가루로 만든 바잉 꾸온, 두부조림, 야채와 돼지고기를 버무린 것, 베트남 소시지가 나왔다. 어머님이 직접 요리하신 베트남 가정식이다. 어디를 가나 가정식 음식은 귀하다.
    히업 씨 집은, 우리와 텃밭이 있는 전형적인 농가 주택이었다. 젊었을 때 목수 일을 하신 부친이 30년 전에 직접 지었다고 하는데, 2년 전에 목재를 덧대고 옆에 한 채를 늘려 지어 오래 된 집처럼 보이지 않았다. 부친은 아들이 태어나자 바로 목재용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땅을 사놓은 히업 씨도 언젠가 그 나무를 베어 자신의 집을 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부친의 가족 사랑이 느껴진다. 텃밭에는 목재용 나무 외에도 과일나무 ‘밋(잭푸르트)’과 ‘념’도 있고 ‘나’도 있었다. 바나나, 용과, 라임나무도 보인다. 각종 채소도 빽빽하게 심어 놓았다. 텃밭에서 나는 채소와 과일만으로도 매 끼니를 풍성하게 차릴 수 있을 것 같다. 마당 한쪽에는 선량한 눈망울을 한 물소 세 마리가 우리 안에서 낯선 방문객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소는 소와 달라서 하루에 한 번씩 논두렁에 데리고 나가 물놀이를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단다. 손수레 그늘 안에서 개 두 마리가 꽁지를 뒤로 한 채 우리를 향해 짖어댔다.
    히업 씨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목장(TH Group 운영)과 수경재배 하우스, 해바라기 밭, 우유포장공장이 있다고 했다. 남편의 전공이 농업인지라 우리는 차량을 한 대 렌트해서 길을 나섰다. 목장으로 가는 길에 본 해바라기 들판은 인터넷에서 봤을 때 무척 아름다워 보였지만 꽃이 피는 철이 아니어서 환상적인 인증샷을 남기지는 못했다.
    목장은 사육 중인 목축우가 몇 십만 두가 되고, 초지는 수백ha가 넘을 것 같았다. 외부 환경의 전염방지를 위해 1~2일 전에 허가 받은 사람만 출입할 수 있다고 해서 내부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관리자 말로는 개체별 사료 주기, 자동 젖 짜는 시설 등 과학적 관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변에는 TH Group 소유인 목초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차를 타고 목초지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지평선이 보이는 목초지를 보니 가슴이 시원해졌다. 문득, 겨울이 없어 사계절 내내 푸른 풀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이 나라가 부럽기까지 했다. 인근 우유공장에도 들렀지만 마찬가지로 입구에서 사진 한 장만 찍고 돌아서야 했다.
    길모퉁이에 할머니가, 아이와 함께 과일 좌판을 펼쳐 놓고 있었다. 참외 비슷한 과일인데 다낭에서도 본적이 있다. 우리는 한국 돈, 천 원을 주고 과일 두 개를 샀다. 길거리에 채송화 같은 예쁜 꽃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꽃송이가 채송화보다 훨씬 컸다. 꽃 이름이 ‘10시에 피는 꽃’(Hoa muoi gio)이란다. 시간을 보니 10시 30분이다. 꽃이 피는 시간은 10시인데 지는 시간은 언제일까?
    시내로 들어서니, 전통시장이 보인다. 잠시 차를 세워두고 시장 투어를 했다. 한국사람 보기가 쉽지 않아서일까, 마주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이것저것 캐묻는다. 히업 씨는 집에서 멀지 않은 이 시장을 어렸을 때는 그렇게 오기 힘들었다고 한다. 돈이 없어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없어서였단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처음 자장면 먹은 일이 생각났다. ‘그때 그 시절’은 어디에나 있나 보다. 먹거리 장터에 온 탓인지 목이 말랐다. 열린 가게에서 사람들이 째(한국의 공차 같은)를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머니가 특미로 만든 째는 과일, 넛트 등 10종이 들어간 건강주스였다. 가격도 저렴한데다 맛도 있어서 잠시나마 우리의 피곤과 더위를 식혀주었다.
    옷가게 점포를 지나다가 히업 씨가 우리에게 옷을 한 벌 사주고 싶다고 했다. 굳이 돈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제자의 성의를 무시하고 싶지도 않았다. 베트남에 온 이후로 반바지 한 벌로 버티는 남편에게 7부 바지 하나를 권했다. 베트남에서 보기 힘든 까만 비닐 봉다리에 7부 바지를 담아 흐뭇해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야간버스의 여독이 풀리지 않아서인지 피곤이 몰려왔다. 히업 씨가 우리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선풍기도 두 대 틀어줘서 우리는 잠시 잠을 청했는데 눈을 뜨니 정오가 되어 있었다.
    점심은 쌀밥과 고기 메뉴였다. 밥, 두부, 생선구이, 돼지고기 구이, 닭고기 삶은 것을 토막 낸 요리들이 나왔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어머님이 직접 요리하신 음식들이다. 닭고기 요리는 집에서 기른 닭을 잡았다고 한다. 마당에 풀어놓고 키운 닭이어서 한국의 닭고기보다 질기지만 건강식이다. 아침, 점심 두 끼를 농심(農心) 가득한 밥과 찬으로 받았다. 텃밭 과일나무에서 딴 용과와 이웃에게 받아 온 구아바로 디저트도 먹었다. 히업 씨의 부모님과, 결혼하지 않은 자식들에 대한 걱정이며, 남편들에 대한 불만 등을 토로하며 웃음꽃도 피웠다. 부모세대와는 다르게, 준비되지 않은 결혼을 마다하는 건 한국도 베트남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히업 씨는 다음 주부터, 하이퐁에 있는 한국 회사 LG에 일하러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노이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야 한다고 했다. 히업 씨와 우리는, 다른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부랴부랴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렌트 차량을 불러 집을 나섰다. 시골이어도 차량 렌트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교통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다낭외대가 개학을 하게 되면 바빠질 것이어서 응에안 방문 날짜를 서둘러 잡았다. 그러다보니 선물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나는 히업 씨 동생에게 소정의 현금을 살짝 쥐어주고 나왔다.
    가는 길목 도로변 좌우에는, 10년생, 7년생 고무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고무나무는 보통 7년생부터 수확을 시작해서 20년 이상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최근 들어 고무나무 심는 농가가 많아지면서 수확량 증가가 가격 폭락으로 이어져 재배농민들이 많은 손해를 입었다고 한다. 베트남 농촌에서도 일거리와 소득이 적다보니 청년들이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많이 떠나고 있다고 해서 안타까웠다.
    우리는 도중에 히업 씨의 외가댁도 방문했다. 외할머니는 연세가 92세이신데 외삼촌과 외숙모, 사촌 동생과 살고 계셨다. 비록 앙상하게 마른 몸매에 기력이 없으신 지 누워만 계셨지만 정신은 또렷해서 손자도 알아보고, 한국에서 온 선생님도 반겨주셨다. 외숙모 말에 의하면 아직도 밥 한 공기는 너끈히 드신다고 한다. 가족들과 사진 한 장을 남기고 또 다른 제자, 진 씨 집으로 향했다.
    진 씨는 다낭에서 우리를 많이 도와주고 있는 딘의 형이다. 한국에 일거리가 별로 없어 이번에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집 지을 돈이 부족해서 다시 한국에 주저앉았다. 사실 먹거리가 풍부하고 가격도 저렴한 베트남에서는 집 한 칸 장만이 일생에 가장 큰 숙제인 셈이다. 마침 진 씨 부모님은 호치민에 가시고 아내와 여섯 살 난 딸만 집에 있었다. 진 씨의 아내는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학교와 4년 계약기간이 끝나서 다음 주부터는 유치원에 출근할 예정이라고 한다. 벽에는 진 씨의 다섯 형제들 결혼사진이 보였다. 이들 다섯 형제들은 각자 돈을 벌기 위해 호치민 등, 대도시에 나가 있다고 한다. 진 씨의 딸 레아는 아빠를 닮아서인지 부끄럼이 많았다. 우리 주변을 빙빙 돌기만 할 뿐, 한 번 안아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진 씨의 아내가 마련해준 여러 가지 열대과일과 사탕수수를 먹고 마시며, 진 씨와 화상통화도 나누었다. 진 씨는 보기 드물게 성실하고 가정적인 남편이다. 하루빨리 진 씨 가족이 모여 사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 1095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 동천관 408호 한국학연구원 actako@km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