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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페르소나’를 쓰고 있는지 모를 때 인간의 비극은 시작된다.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
#에스프레소(Espresso)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에스프레소 애호가는 아니다. 오히려 평소에 자주 마시는 커피는 아메리카노나 커피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봉지커피 정도이다. 하지만 가끔은 에스프레소가 생각난다. 그 생각이 떠오르게 된 연유는 에스프레소의 진한 맛에 있기보다 소리와 잔향에 있다. 그러니까 ‘에-쓰으-프렛-쏘오-’라고 발음할 때 바람 소리와 같은 그 청각적 여운과 그것을 마시고 난 뒤 길게 느껴지는 잔향 때문이다. 만약 에스프레소를 멋진 카페테라스에서 마시게 된다면 그 여운과 잔향은 배가되리라.
에스프레소를 떠올리면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함께 떠오른다. 아마도 ‘프-레’라는 발음이 ‘페-르’를 끌고 오기 때문일 것이다. 발음의 유사성으로 인해 자유롭게 연상된 것이리라. 페르소나는 연극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기 위해 배우가 쓰는 가면을 말한다. 개인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퍼슨(person)과 인격을 가리키는 퍼스낼리티(personality)도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한 개인은 페르소나에 의해 반드시 자기 자신의 것만은 아닌 성격을 연출하여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쉬운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즉 페르소나는 개인이 공적으로 보이는 가면이자 겉모습이다. 나는 언젠가 한번 다양한 종류의 커피들이 에스프레소의 페르소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커피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커피를 분류하는 방법에 따라 그 종류가 달라지겠지만 여기서는 에스프레소를 기준으로 만든 커피의 종류를 말한다. 그 커피들에는 에스프레소 안에 따뜻한 물을 넣은 아메리카노, 스팀우유를 넣은 카페라떼, 스팀우유와 우유거품을 넣은 카푸치노, 스팀우유와 초코시럽 그리고 휘핑크림을 넣은 카페모카 등이 있다. 그러니까 이 커피들의 기본 원액은 에스프레소다. 커피의 순수한 원액 그 자체, 커피의 맨 얼굴을 나는 ‘에스프레소’라 부르고 싶다. 커피의 페르소나인 휘핑크림을 벗어던지고, 우유거품을 걷어내며, 따뜻한 물로 농도를 희석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커피의 맨얼굴, 에스프레소를 만나게 된다.
#페르소나(persona)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시간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시간은 나의 맨얼굴과 만나는 시간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자기와의 대면 혹은 자기응시라고 부를 수 있겠다. 자신의 역할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에게 솔직함, 정직함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최면이나 자기합리화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누구나 다 맨얼굴과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심리학자 융은 인생에 있어서 비극은 맨얼굴을 드러내야 할 때 페르소나를 내세우고 페르소나를 써야 할 때 맨 얼굴을 드러내는 것에 있다고 했다. 가령, 어느 연예인이 비난 받는 자신을 자아와 동일화시켜 괴로운 나머지 세상을 등진다거나 혹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기러기 아빠가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이들은 자신을 괴롭게 하는 그 역할이 자신의 페르소나 중 하나인지 몰랐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는 안 좋은 일이 있던 사람이 페르소나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하고 그것과 무관한 사람에게 자신의 화난 맨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다든지 할 때이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바람직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회의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사실 페스낼리티에 있어서 페르소나의 역할은 득이 될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다. 한 개인이 자기의 페르소나 역할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자아와 이 역할을 동일화하기 시작하면 그의 퍼스낼리티의 다른 측면은 그 균형점에서 밀려날 것이다. 페르소나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의 본성에서 소외당하게 된다. 지나치게 발달한 페르소나와 동일화하는 것, 융의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팽창’이라고 부른다.
‘팽창’의 유형 중 하나는 제 역할을 잘 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자만심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유형은 강요하길 좋아하며 때로 이 역할을 남에게 투사하여, 같은 역할을 하도록 요구한다. 다른 하나는 열등감과 자책감에 내몰리는 경우이다. 페르소나가 팽창한 사람은 자기의 상황이 그 역할에 대한 자기의 기대 수준에 못 미칠 경우, 공동체에서 소외당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결국 고독감과 소외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팽창을 피하려면 페르소나를 수축시켜 개인의 본성이 균형점을 찾을 수 있도록 그것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페르소나를 너무 오랫동안 쓰고 있으면 맨 얼굴을 잊어버릴 수가 있다. 그리고 페르소나를 벗고 맨얼굴이라 생각했는데 실상은 또 다른 페르소나를 쓰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맨얼굴을 잊지 않도록 한 번씩은 만나야 한다. 자신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실은 흥미가 없는 일을 흥미가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는지, 자기의 기분과 관심에 대해 위선적이지는 않았는지 가끔은 스스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페르소나와 동일화해 온 사람에게는 더없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니 문득 한 잔의 에스프레소가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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