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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씨 가족과 헤어진 후, 렌트 차량을 돌려보내고 시외버스를 타러 갔다. 아이・타이 자매가 살고 있는 끌로(Cua Lo)시로 가기 위해서였다. 시외버스는 20인승 작은 버스였는데 동네 아주머니 세 분이 손주를 한 명씩 데리고 탔다. 세 분은 자매라고 하는데 한국 아주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수다가 여간 아니었다. 끌로까지 2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 동안, 아주머니들의 입담은 끝이 날 줄 몰랐다. 요즘 한국에 일하러 가기 어렵다는 이야기, 얼마 전 한국어 시험에 만 명이 응시했는데 10%인 천 명만 한국에 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 한국 여자들은 피부가 좋다는 이야기 등등. 버스는 타이화(Thai Hoa) 시내에서 택배 물건을 싣기 위해 한참을 정차하였다.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베트남에서 시외버스(intercity bus)는, 사람을 실어 나를 뿐만 아니라 물류 역할도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다.
오후 5시 8분. 끌로 시의 응이록(Nghi Loc)에 내렸다. 택시기사와 약 5분 정도 흥정을 해서 10만 동(5천 원)의 돈을 주고 타이 씨 집으로 향했다. 달리는 도로 주변에는 잉어를 키우는 양식장이 많았다.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끌로 시는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라는데 민물양식까지 하는 게 신기했다.
끌로 시내로 들어왔다. 좌측으로 끌로 해변이 보인다. 뜨거운 한낮이라 해변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작년 미스베트남 선발대회가 열렸다는 끌로 광장도 통과했다. 타이 씨의 집은 끌로 해변 가까이에서 대로변을 끼고 있었으며, 약 6개월 전에 완공한 3층짜리 새집이었다. 땅 사는데 7천만 원, 집 짓는데 1억 원, 모두 1억7천만 원이 들었다고 한다. 마침 퇴근하고 집에 온 자매를 만나 우리는 가방만 1층에 내려놓은 채, 관광용 전기차를 타고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언니인 아이 씨가 회사직원들과 자주 가던 해물 식당이라는데 재료도 신선하고 가격도 싸다고 했다. 관광용 전기차는 적당한 속도로 달려서 바람을 맞으며 끌로 시내의 야경을 만끽하기에 그만이었다. 곧 아이 씨의 회사 직원 두 명도 식당으로 합류했다. 의기투합한 7명은 조개, 새우, 생선, 채소류 등의 해물과 캔맥주를 곁들여 유쾌한 저녁 식사를 마쳤다. 럭셔리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현지 주민들이 애용하는 식당인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식사가 끝나자 히업 씨는 하노이행 야간버스를 타기 위해 우리와 작별인사를 했다.
히업이 떠나고 우리는 끌로 해변의 밤바다로 나갔다. 밤바다에는 등불을 켜고 오징어 조업을 하고 있는 작은 배들과 관광용 바구니 배가 여기저기에 보였다. 조업을 마치고 들어온 배를 가까이서 보니, 어부는 두 공기 남짓한 꼴뚜기를 그릇에 옮겨 담고 팔고 있었다. 해변을 거닐며 사진도 찍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면서 여름밤의 더위를 식히다가, 해변의 작은 가게에 둘러앉았다. 한국에서 10년 이상 살았던 자매는, 한국어가 유창하다보니 한국인 회사에서 통역도 하고 한국 유학원에서도 일하고 있다고 한다. 코코넛 야자수를 마시며 이들 자매의 베트남 적응기를 들었다. 오랜 기간 베트남을 떠나 있었던 데다가 아직은 한국 생활과 사고방식이 몸에 배여 있어서 베트남 생활이 쉽지 않다고 했다. 아이러니하다. 끌로 시도 관광지여서인지 인근에 호텔이 많았다. 밤이 깊어져 인근 호텔에서 묵겠다는 우리에게, 자매는 극구 만류하며 자신의 방을 내어 준다. 마지못해 2층 주인 방에서 잠을 청했고, 자매는 3층으로 올라갔다. 새벽이 되자 언니인 아이 씨는 회사로 출근하고, 반나절 휴가를 낸 타이 씨와 우리 부부는, 인근 식당에서 분짜로 아침을 먹고 전통 베트남 커피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타이 씨의 도움으로 다시 차량을 렌트한 우리는 마지막 행선지인 응에안의 주도, 빈(Vinh)시로 출발했다. 차내에서 히업 씨의 고향에서 산 과자를 먹었다. 과자 이름이 반화(Banh Hoa), 굳이 해석하자면 꽃떡, 꽃빵 등으로 풀 수 있겠다. 차창으로 산이 보인다. 응에안은 베트남 63개 성 중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곳이다. 평지가 있고, 가끔 산도 보인다. 드문드문 민가가 보이고 논밭 옆으로 공동묘지도 흔하다. 지도상으로 보면 성의 서쪽지역이 산악지대였고 그곳에 큰 국립공원이 있는 듯했다.
오전 11시, 호치민 생가가 있는 지역에 도착했다. 주변이 잘 정비되어 있어서 관광지 분위기가 난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자니 키가 나지막한 초가 두 채에, 돼지나 소를 키운 듯 보이는 헛간이 딸린 생가가 보인다. 인간 호치민의 크기에 비해 집은 규모가 작고 소박하다. 큰 초가에 T자로 붙어있는 작은 초가가 이어진 구조이다. 작은 초가 내부로 들어섰다. 실내는 방 2개에 침대 2개가 있었고, 입구 쪽에 디딜방아 하나가 놓여 있다. 뒤로 나가는 문이 열려있었고 옆으로는 큰 초가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재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쉬거나 책을 볼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큰 초가에도 방이 2개에 침상이 있었고, 식사할 때 사용했을 법한 테이블과 여러 개의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호치민은 생전에 자신을 드러내길 원치 않았던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호 아저씨’로 불리길 원했던 그의 향기가 집안 곳곳에서 묻어나는 듯 했다. 인근에 있는 호치민의 부친 집에도 가 보았다. 부친의 집은 호치민의 생가와 달리 현대식 건물로 잘 지어져 있었다. 붉은 벽돌 건물이 두 채가 있고, 주변은 넓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정원 가운데에 작은 연못이 있었지만 더운 날씨 때문인지 물은 말라 있었다.
햇빛을 피하기 위해 잠시 선물가게에 들어가 보았다.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점원들은 손님이 와도 반길 생각도 없이 자리에 누워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운전기사와 함께 인근 식당에 들어갔다. 15만 동을 주고 3인 세트 메뉴를 주문했다. 두부반찬, 모닝글로리, 미역국, 닭고기 국과 무침 등 입맛에 맞는 찬들이 많아, 관광지에서 먹은 음식치고 만족스러웠다. 식사 후에 기사의 권유로 호치민 동상이 세워져있는 호치민 광장을 찾았다. 그러나 햇빛 가림이 거의 없는 뜨거운 광장에서 몇 컷의 인증샷만 찍고 도망치듯 장소를 벗어나야 했다.
응에안 성의 주도인 빈 시는 인구 50~60만 명의 큰 도시이다. 나는 운전기사에게 주소 하나를 내밀었다. 빈(Vinh)이라는 베트남 사람이 보내온 한국어 학원의 주소였다. 다행히 학원이 10분 거리에 있다고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학원에 들어서니, 직원으로 보이는 베트남 여성 두 명과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한국인이 한 분 계셨다. 한국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국어교사를 하신 분이었는데, 명퇴를 하고 지난해부터 이곳에 거주하고 있단다. 빈(Vinh) 씨도 만났다. 빈 씨는 한국에서 6년 근로자로 일하고 2014년에 돌아와 이 학원에서 한국어 강의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현재 학원의 수강생은 10여 명이지만 연간 약 100여명을 한국 대학으로 유학을 보낸단다. 선생님이 방문해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며 무척 기뻐했다.
끌로 시를 떠나 올 때 우리는 차를 하루 종일 빌리는 조건으로 1300만동의 (한국 돈 6500원)돈을 지불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기사는 날씨가 너무 무더워 더 이상 관광이 힘들다고 했다. 나이도 있으시고 광장의 열기도 경험한 바 있어서 우리도 더 요구하지 않았다. 이미 제자들도 만났고 호치민의 생가도 방문한 터여서 무리할 필요도 없었다. 기사에게 우리를 다낭행 버스를 탈 수 있는 터미널에 데려다 달라고 하고 도착 후, 기사를 끌로 시로 돌려보냈다. 저녁으로 쌀국수를 한 그릇씩 먹고 4시간을 기다려 8시 30분에 다낭행 야간버스틀 탔다. 차창으로 비가 쏟아진다. 2천 5백리 길을 달려와 제자들과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았다. 언제 다시 그들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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