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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되면 저절로 마음이 푸르러진다. 초등학교 하굣길에 수성교로 향하는 건널목을 건널 때 내 눈에 들어온 긴 사각형의 화분에 가로로 새겨진 ‘5월은 푸르른 달’을 아직 기억한다. 5월이 푸르른 것은 나무가 울창해지기 때문이겠지만 나의 마음이 푸르른 것은 ‘어린이날’이 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로 초반에 걸쳐진 나의 초등학생 시절은 가난했지만, 마냥 즐거웠다.
‘어린이날’은 크리스마스와 같이 부모님께 선물을 받았다. 나에게 ‘어린이날’은 그저 학교 안 가는 날일 뿐이었다. 그 당시 부모님은 생활에 쫓겨 ‘어린이날’에 선물을 살 겨를이 없었다. 생일에도 생일상을 차려주는 것도 버거워서 그냥 지나쳤다. 그래서 나는 다른 친구의 생일이 내 생일보다 더 기뻤다. 친구의 생일상에 차려진 떡볶이, 과자, 빵, 사이다 등을 마구 먹을 때는 눈물겹도록 행복했다.
그 당시 ‘어린이날’에 가장 인기 있었던 선물은 ‘스카이콩콩’이었다. ‘스카이콩콩’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TV에 선전도 했다. ‘스카이콩콩’을 선물 받은 친구들은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스카이콩콩’을 탔다. 내 기억에 ‘스카이콩콩’의 가격은 8,000원 정도였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이 500원이었으니까 8,000원은 제법 큰 돈이었다. 나는 5월의 따뜻한 햇볕을 맞으며 ‘스카이콩콩’을 뛰는 친구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 번만 타자고 했더니 10원을 달라고 했다.
‘어린이날’의 마지막인 6학년의 ‘어린이날’에 어머니가 500원을 주셨다. 나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이 큰돈은 무엇인지 어리둥절했다. 어머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린이날’에 나에게 돈을 주셨다. 나는 어머니가 100원 동전을 500원 동전으로 착각하신 게 아닌가 의심했다가 어머니가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그 돈을 챙겨 뛰어나갔다. 내 마음은 이미 ‘방천시장’에 가 있었다. 그 시절 ‘방천시장’은 물건과 사람과 먹을거리로 활기가 넘쳤다. 나는 우선 분식을 파는 포장집에 가서 떡볶이와 만두를 200원어치 시켰다. 얼굴이 새까맣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주머니와 옆에서 일을 거드는 초등학생 딸이 떡볶이를 아주 맛있게 만들었다. 떡볶이 8개와 만두 4개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나왔다. 나는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평소 먹고 싶었던 음식이라 맛있게 먹었다. 그 후로 시장을 계속 돌아다녔다. 시장에는 학교 친구들이 많았고 점포나 좌판도 친구 부모님이 운영하는 여러 군데 있었다.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친구를 만나면 잠시 놀고 또 돌아다녔다. 해지기 전에 만난 친구와 김밥집에 갔다. 그곳은 대량으로 김밥을 만들어 도매로 파는 곳이었다. 마르고 말수가 적은 주인아저씨의 배려로 한 줄에 100원씩을 주고 김밥 두 줄을 사서 친구와 한 줄씩 먹었다. 김밥 속에는 단무지와 시금치, 실처럼 가는 분홍 소시지만 있었지만 꿀맛이었다. 마지막 남은 100원은 한 개 10원씩 하는 풀빵을 10개 샀다. 그 풀빵은 서로 붙어 있고 팥이 줄줄 흘러나와 흐물거려서 ‘걸배이빵’이라 불렀다. 넉살 좋은 풀빵 장수는 한 개를 더 담아 타자기 이면지에 담아 주었다. 집에 가서 형과 맛있게 먹었다.
‘어린이날’에 아내가 아이들에게 무슨 선물을 하면 좋겠냐고 내게 물어보았다. 나는 농담으로 ‘스카이콩콩’이라고 대답했다. ‘스카이콩콩’이 이제는 사라진 줄 알았기 때문이다. 며칠 뒤 퇴근하여 집에 가니 아이들이 택배 상자를 뜯고 있었다. 거기에는 ‘스카이콩콩’이 있었다. 아내에게 얼마냐고 물어보니 2만 원 정도라고 했다.
이번 ‘어린이날’에 나는 아내와 함께 따뜻한 햇볕을 맞으며 ‘스카이콩콩’을 뛰는 딸과 아들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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