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캠페인으로 시작된 국제결혼은 이제 우리 이웃들의 일상이 되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유아였던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 사춘기를 맞게 되면서 아이들의 사소한 문제는 가정과 학교의 일탈로 나타나고, 서서히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엄마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왔을 이 아이들의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고 나아가 자긍심을 가진 글로벌 인재로 키울 방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나.
몇 년 전에 베트남어를 공부하던 팀원들과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자 대구시에서 시행하는 마을공동체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남구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왜 호치민인가?’라는 책의 저자인 송필경님을 초청해서 강연회를 열기도 하고, 고령의 한 마을을 방문하여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베트남 동화를 들려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시골 마을이 그렇듯이, 그 마을은 13가구의 다문화가정이 있었고 그중에 캄보디아 두 가구를 제외한 11가구가 베트남에서 온 여성들의 가정이었다. 우리는 다문화가정에 베트남 문화를 소개하는 방편으로, 베트남 전래동화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한국 가족에게 읽어주고, 베트남 여성 결혼이민자(이하 이주여성)와 아이들을 위해 베트남어로 동화로 들려주는 일을 기획하였다. 마을회관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베트남 동화를 들려주는 동안 이주여성들의 눈에는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여성들의 뜻밖의 반응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주여성들은 한국어가 서툴다 보니 남편과 시부모와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 유일한 한국인 가족들은 그들에게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고 한국어만 사용하기를 강요한다. 베트남어나 캄보디아어 사용을 금기시하는데 아이가 태어나면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진다. 그러니 10여 년이 넘는 한국살이 동안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릴 적에 들은 적이 있는 모국의 전래동화를 들으니 서러움과 반가움에 감정이 복받쳤던 것이다.
행사를 끝내며 마무리 발언을 요청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나는 당부하였다. 남편은 아내 나라의 문화와 말을 배우도록 노력하고 아내의 말을 막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 아이들이 엄마 나라의 말을 배우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했다. 외국어는 힘이 있고 외국어를 잘하게 되면 아이의 대학 진학도 훨씬 수월해진다고 약간의 미끼도 던졌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한국어만 할 수 있지만 너희 엄마는 2개 국어를 하는 사람이지 않느냐, 너희들은 왜 훌륭한 외국어 선생님을 옆에 두고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느냐고 질문도 던졌다. 한국은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고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그때 너희들이 한국의 대표로서 일할 기회가 올 것이다.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가 되거나 베트남을 상대로 사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꼭 베트남어를 배워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복한 가정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할 때 이룰 수 있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일탈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아이들에게 엄마를 무시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것이리라.
둘.
나는 작년에는 중국 엄마를 둔 다문화가정의 아이를 가르친 적이 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였는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수업 시간에도 교실에서 고성을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는 등의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아이였다. 가족들은 아이의 행동에 힘들어하면서도 성장 과정일 뿐이라며 ADHD를 의심하는 학교 교장이나 담임의 충고를 일축하고 있었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학교 측에서는 한국어 교사로 온 나에게 학습과 관계하여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아이를 잘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하였다.
아이와의 첫 대면에서 큰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한 나는 학교 선생님들의 우려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첫 시간에 조용했던 아이는 두 번째, 세 번째 수업이 거듭될수록 상상할 수조차 없는 행동들을 하기 시작했다. 한글 수업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수업 시간이 되어 내가 교실에 들어서면, 아이는 교실 안의 물건을 모두 바닥에 던져버리거나 고함을 질러대고 심지어 막대기를 들고 와 눈앞에서 휘두르며 위협을 가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8살짜리 아이에게 1시간을 시달리고 나면 내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 집에 와서는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며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부모와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초등교사인 작은딸이 있다. 어릴 적부터 아이들을 좋아하던 딸아이는 동네 아이들이나 교회 아이들을 도맡아 돌봐주곤 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서울에서 초등교사가 되어서 자신의 역량을 잘 발휘하고 있다. 작은딸은 진심으로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그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방학이 되어 대구집에 내려오면 딸은 교육 관련 영상을 켜놓고 보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도 딸아이와 영상을 함께 시청하며 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른 것일까. 나는 어린 8살짜리 학생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고 기다려주기로 했다. 아이의 위협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가 흥미를 느낄만한 주제를 무심히 툭툭 던져주었다. 한 달여 시간이 지나자 아이에게 작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는 내 옆자리에 앉기도 하고 먼저 말을 걸기도 했다. 처음에는 하루에 10분, 다음날엔 20분...... 그렇게 글자 공부도 시작할 수 있었다. 한 학기가 끝날 때쯤에는 아이가 선생님을 매일 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아이에게 가족에 대해 물어 보았다. 할머니를 가장 사랑하고 동생을 사랑한다고 했다. 아빠 이야기도 했지만 유독 엄마 이야기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는 엄마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이의 가족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듯했다. 아이는 그런 문제가 생긴 건 순전히 엄마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와 신뢰 관계가 충분히 형성된 후, 나는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엄마는 중국에서 왔기 때문에 한국어를 잘 몰라. 한국말을 못 하니까 엄마가 정말 답답하실 거야. 한국말을 잘하는 네가 엄마한테 한국말을 가르쳐줘야 해. 그리고 너는 엄마에게 중국말을 배우면 나중에 대학생이 되어 중국에 여행도 갈 수 있을 거야.” 라는 말을 하면서 엄마와의 심적 거리를 좁혀주려고 노력했다.
힘들게 겨우겨우 수업을 이어 가던 어느 화창한 날, 하교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 문을 나섰다. 그날따라 교문에서 늘 기다리던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고 낯선 여성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그 사람에게 뛰어가더니 우리 엄마라고 당당하게 소개해주었다. 엄마가 학교에 온 것도 처음이고 그렇게 싫어하던 엄마를 반기는 모습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음날 아이는 나에게 물었다. 엄마와 할머니 중에 누가 더 예쁘냐고. 할머니도 예쁘고 엄마도 예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엄마가 쬐끔 더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지금도 그때 아이의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주변에 다문화가정 아이가 있다면 말해주자. 너희 엄마는 2개 국어를 하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너도 엄마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그리고 아이에게 엄마의 나라에 대해 배우게 하자. 아이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하고 가족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고 아이를 글로벌 인재로 양성하기 위한 선결 과제일 것이다. (E-mail: anuda2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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