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지역은 지역만의 독특한 성질을 갖기 마련이다. 이를 지역성 혹은 장소성이라 칭하며, 이 고유하고 독특한 성질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연구되고 있다. 이를테면 지역이라는 장소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데, 지역이라는 장소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작용하고 있는(혹은 작용했던) 요소들을 알아가는 것은 지극히 즐거운 일이다.
지역, 혹은 장소의 정체성은 사회적 관계물의 상호 작용의 결과이다.1) 필자는 대구에, 정확히는 한국전쟁기 대구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 이러한 관심은 대구라는 지역의 정체성을 밝히고 싶다는 무모한 욕구로 확장되었으나, 특정 지역의 정체성을 섣불리 규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지역은 역사 속에서 연속된 형태로 존재하며,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지닐 수는 있으나 구분되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대구, 혹은 한국전쟁기 대구의 지역 정체성을 규정하기보다, 한국 전쟁기 대구의 풍경을 살펴봄으로써 대구가 지니는 지역 정체성의 편린을 공유하고자 한다.
근대 이후 한국전쟁만큼 우리 사회를 급변하게 한 사건이 있었던가. 연합군과 함께 유입된 물자는 우리의 의(衣)생활과 식(食)생활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각 지역 사회의 원 구성원들은 전재 피난민이 되어 나고 자라온 지역을 떠나 전국 각지로 퍼졌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 미군 부대 등지에서 흘러나온 의복·식자재와 타지에서 유입된 전재 피난민으로 인해 지역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바뀌었다. 그러한 변화를 단편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료가 기자 이목우의 단평집인 『시대풍』이다. 지역 사회의 모습과 사회 구성원들의 모습을 단평(短評)의 형식으로 기록한 『시대풍』은 1950년대 초 대구의 지역 사회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한국전쟁기의 대구는 부산과 함께 임시수도로서 기능했다. 미 제8군사령부, 육군본부 등이 들어서며 군사적 요충지로 기능하기도 했다. 비교적 후방이자 군사적 요충지이기에 전재 피난민들은 남으로 남으로, 대구와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피난 문인이자 해군종군작가단으로 활동한 소설가 윤금숙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구로 몰려든 피난민은 ‘무슨 추한 두엄 무데기’2)같은 모습이더란다. 한국전쟁기 3년간 대구의 인구는 약 46%가 증가했는데,3) 급격히 늘어난 인구를 도시는 담을 수 없었다. 정부는 소개령을 통해 인구를 분산하려 했으나 미미한 효과에 그치고 말았다.
대구지역의 제이호법정은 아직도 피난민들이 점령하고 있다. 재판장과 검사가 착석하는 단(壇)위에는 대소각양의 깡통과 식기와 솟과 그리고 약간의 신탄(薪炭)을 두었고 피고인과 간수와 방청인이 착석하는 곳에 십여세대의 가족들이 잡거(雜居)하고 있다. 그들은 종일토록 송판으로 가리운 일호와 삼호법정에서 들리어오는 후방의 악(惡)! 각종 범죄에 대한 심판의 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다. 후방의 죄악사(罪惡史)를 엮는 위원회가 생긴다면 이 법정 피난민들을 위원에 선출하지않으면 안된다. (後方의 罪惡史)4)
산동네, 도로, 바라크, 셋방, 속칭 ‘하꼬방’ 등 전재 피난민들은 지친 심신을 달랠 곳을 가리지 않았다. 위 인용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재판을 위한 법정 역시 전재 피난민들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법정이라는 비교적 갖춘 건물에 몸을 누이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대구 신천 건너편, 대구역 주변, 비산동 등지에서 몸을 누이던 피난민도 있거니와 그마저도 구하지 못해 다른 지역으로 피난을 가야 했던 피난민들도 있었다. 전선에서 비교적 후방에 위치했지만, 이곳 대구는 생활 전선의 최전방이었던 것이다.
1) Massey. D, 『공간, 장소, 젠더』, 정현주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220쪽
2) 윤금숙, 「대구의 하로」, 『전시문학독본』, 계몽사, 1951. 88쪽
3)1950년 269,406명이던 대구의 인구가 휴전 해에는 393,852명으로 집계되었다. 《대구시사》 제4권 참조.
4)이목우, 『시대풍』, 대구인쇄소, 1952. 16쪽.
한편, 『시대풍』에는 당시 대구 사회 구성원들의 생활 양상도 묘사되어 있다.
(가)
맵시좋은 전발(電髮)에다 『하이힐』 유동치마저고리도 있고 양장도있는데 모두들 입술은 붉고 화장을 썩 잘했다.
이른아침의 공장가를 떼를지어가는 방직여공들이다.
가다가 마주치면 그순간에 향기그윽히 남성의 코털을 자극하고 어쩌면 저렇게도 미모의 여성이 많은가 가슴조차 답답해진다.
광목치마저고리에다 검둥고무신을 신고 『타올』로 머리를 싸고해서 바구니 보리밥을 점심으로 이고가던 몇해전의 가난한 여공들의 자태를 상기하면 요즘 여공들의 복식은 귀부인의 그것에 속한다.
시대의 『탬포』는 빠르다! (女工風景)5)
(나)
시장에 가면 풋대추와 풋밤과 생생한 석류가 추석을 부르고 있다. 어느새 동란일년여! 포성을 들으면서 조선(祖先)을 모시던 지난해와는 딴판으로 경상도사람은 먼 후방에서 가을한대목의 정서에 담뿍 젖게되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전우들은 신묘년에 나온 석류의 차디찬 쓴맛을 모른다. 추석의 정서에는 슬픔이 기어 들고 있다. (秋夕의 情緖)
(다)
『좋은 고기죠』『얼만가?』『한사발에 오천원』『이자식 삼천원만 해!』『안되요 우리도 받아온건데…』 피난민의 아들 십오세전후의 소년이 이명(二名) 금호강변에가서 숭어를 구입 사구려 사구려 하면서 시내를 걸어다녔다.
위탁판매인지 알수없으나 피난민자제들의 상재(商材)가 촉망된다. (商材)6)
공장 여공들을 바라보며 세태의 급변에 놀라는 관찰자의 정서나, 혹은 전쟁 중 맞이하는 명절 풍경과 명절을 보내는 민중의 정서,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피난민의 모습 등 다양한 생활상을 제시하고 있다. 관찰자의 이러한 시선은 지역에 대한 애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지역 사회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와 민중들의 생생한 모습, 그리고 그에 투영된 관찰자의 애착을 숨김없이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다방, 법정 출입, 유곽, 잡기 등의 내용 역시 기록되어 있어 당대의 대구를 더 풍부하게 살펴볼 수 있다.
물론, 당대 피난 및 종군활동을 했던 문인들의 기록에서도 한국전쟁기 대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최정희, 윤금숙, 최인욱, 고은 등의 문인들 역시 대구에 머물며 대구의 모습을 기록했으나, 임시 거처로서의 대구의 모습 혹은 외지인으로서 경험한 대구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풍』과 차이를 보인다. 물론 이목우의 기록과 함께 당대 문인들의 대구에 대한 기록은 모두 지역의 성격을 규명함에 매우 중요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목우의 기록은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본 대구가 아닌, ‘대구에서 바라본 대구’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른바 ‘글로컬’의 시대라 한다. 지역 특성을 살린 세계화를 추구한다는 이 ‘글로컬’을 추구하기에 앞서 지역의 특성을 규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건강한 글로컬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역의 특성을 규명함에 앞서 이목우의 단평집과 같은 자료들이 많이 발굴되어야 할 것이다. 지역 구성원으로서, 지역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막중한 책무와 깊은 애정을 지닐 수밖에 없다. (E-mail: gwont@daegu.ac.kr)
5)『시대풍』, 59쪽.
6)『시대풍』,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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