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보기
* 발행일 : 2023년 11월 25일


   가을은 바람이 좋다. 어린 날 지냈던 고향 집 담장 끝에는 오래된 감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바람이 깊은 날이면 다 익은 감이 바닥에 철푸덕 떨어졌는데, 어린 언니와 나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것들을 주워 소쿠리에 담아 와서는 저녁 내내 먹곤 했다. 가을에 나오는 과일 중 가장 먼저 감을 떠올리고, 그 맛을 유독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며칠 전 문화마을 탐방을 위해 대구의 옻골 마을을 찾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뜻밖의 광경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감빛의 은은함과 그 맛이 주는 생동력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 옻골은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가구 수가 적고, 작은 규모의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 찻집에서 일행과 함께 탐방에 관한 몇 가지 논의를 하면서, 나는 유리창 너머의 풍경에 마음이 빼앗겼다. 산으로 둘러싸인 폭닥한 집들, 집과 집 사이로 멋들어지게 솟아있는 감나무들, 그것들을 청청하게 끌어안고 있는 푸른 하늘은 알 수 없는 어떤 설렘을 안겨주었다. 핸드폰을 들고 그 풍경을 담으면서도 이 마을이 왜 이렇게 편안하게 느껴지는지는 알지 못했다.

   본격 탐방을 위해 마을 초입에 들어섰다. 수호의 상징물처럼 큰 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는 것과 달리 집들과 골목은 좁은 길에 기대어 있었고, 흙벽과 기와들과 마른 나뭇잎들이 고요하고 여유로운 풍광으로 다가왔다. 현지인들이 살고 있어서 조용히 살펴야한다는 안내에 따라 우리는 와당의 문양을 살피고 담장 너머의 살림살이를 기웃기웃하면서 가만 걸었다. 그러다 마을 중간쯤에 이르면서 출입이 허가된 빈 고택으로 들어섰는데, 집 안으로 막 들어서면서 나는 거짓말처럼 어느 세계가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가을빛에 붉게 타오르는 맨드라미와 돌멩이로 덧대어 만들어놓은 꽃밭의 해바라기 그리고 그 가장자리로 뻗어 올라간 감나무, 바람에 제 잎을 붉힌 나뭇잎. 나의 옛집 모습이었다. 고향 집은 꽃을 좋아하는 가족을 위해 부모님이 만든 꽃밭이 있었고, 닭 벼슬을 닮은 맨드라미와 해바라기, 그 뒤로 까맣게 뻗어 올라간 감나무 가지들이 유년의 가을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때 그 모습 속에 있다는 착각을 하였다. 불현 듯 방문을 열고 ‘이제 오냐’며 나를 부를 것만 같은 얼굴도 스쳐갔다.

   비밀의 문이 열리고 그 세계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흡사 나니아의 환상 속 같았다. 환상이 기억의 저장고를 열어 어떤 형상을 내어 놓고, 그 형상이 마음속에 안전하게 숨어있었던 설렘과 그리움의 이미지를 불러내 조응하고 상응하는 이 느낌을 나는 내버려 두었다. 이 순간은 장소와의 만남이 아니라 시간과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그리운 이의 얼굴을 찬찬히 어루만지듯, ‘너 맞는 거지’ 라는 마음을 가만 두었다. 나를 환대해 주는 이 풍경은 어쩌면 그간의 알 수 없는 시간의 어려움을 묵묵히 견디게 하고 버티게 한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멈춰있는 나의 어깨를 흔든 일행이 ‘이제 갈 시간’이라고 전해주고 나서야, 나는 나를 깨워 걸음을 돌려세웠다. 가을은 바람이 좋다 그리고 깊다. 가을바람이 차가워지면 몸살을 앓는 나에게 감을 먹이는 나의 몸은 어린 시간을 누이고 다정하게 들려주는 선물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옻골은 잊은 줄도 모르고 있던 잊힌 마음을 나에게 돌려주었으니, 나는 나에게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그날 일기에 썼다. (E-mail: min2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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