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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초개인화' 시대라고들 한다. 사회가 개개인의 취향과 가치관을 섬세하게 인정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더 잘 알게 되었고, '나다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동감 넘치는 고민들이 모색되었다. 그러나 그런 모색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로까지 확장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서로 다름에 대한 인정과 관용(寬容)의 시선이 전보다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무관심', '배타(排他)'라는 문제가 바로 이 시점에 유독 두드러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개인의 취향과 행복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을 일률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에 모두 동의하지만, '타인'과 ‘집단'의 행복은 별로 고려 대상이 아닌 사회. 그 속에서 우리는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은 왜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까?
이 천지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고 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게 된 것은 어찌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방(五方)의 구역은 너무 다르고, 동서남북이 각자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 만나 투합한다는 것은 '때'를 반드시 기약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같은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게다가 한 나라에 같이 살고, 한 나라에 같이 살면서도 심지어 한 고을에 같이 산다면 행운 중에 행운으로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하도 '사해의 안에 사는 사람이 모두가 형제이다.'라고 하셨지요. 더구나 같은 나라에 태어나 같은 고을에 산다면 비록 같은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마음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김종직, 「점필재집」문집 권2 「밀양향사의재기(密陽鄕社義財記)」
영남을 대표하는 문인 학자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1492)도 이와 유사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점필재는 15세기의 조선이 각종 물질적·제도적 문명의 구축을 완성한 '이후의 삶'에 주목하고, 그런 높은 문명적 수준에 걸맞은 정신적·문화적 지향점에 대해 진지하게 모색한 인물이다. 그는 1489년, 조정에서 은퇴한 뒤 고향 밀양으로 돌아와 사인(士人)이 자신의 학적·정치적·계급적 존재 여건을 넘어 백성을 비롯한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점필재는 내 옆에 있는 가족-동료-제자-백성들이 같은 시대-같은 나라-같은 고을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겹친 운명적 결과인지 역설한다. 인간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 없이, 그저 높은 확률을 뚫고 만나게 된 수많은 인연은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신기하고 소중한가?
이 직관적인 질문은 「논어」의 군자의 책무의식을 강조하는 '사해동포(四海同胞)' 정신에서 착안한 것인데, 점필재는 초점을 다소 전환하여 자신의 혈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내 옆의 존재들을 사랑함으로써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나와의 관계가 멀어질수록 진심의 강도가 약화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나와 관련이 없다고 여길 때, 그런 존재들을 향한 마음은 각박해진다. 그러나 점필재가 보기에 나와 관련 없는 존재란 없다. 그가 같은 집단, 같은 지역, 같은 나라부터 같은 시기와 세상이라는 거시적 스케일까지 시야를 확장하며 신기한 인연과 감사함을 강조한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글에서 노년의 점필재는 그러한 확장이 가능하려면 '어질고도 진심 어린 마음[仁]'과 그것을 유지하려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마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개개인의 정신이 얼마나 고양되어 있는지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점필재가 던진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이 사회가 개인과 개인이 만난 총합에 불과한 것이 아닐진대, 우리는 하나의 운명적 공동체로서 필연적으로 상호 교류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수많은 다른 존재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사실 별것 아닐지도 모를 진심을 나누는 것, 다른 존재에 대한 조금 더 관대한 이해와 관심의 시선을 보내는 의식적 노력을 놓치지 않는 것. 너무 즉자적인 개별성을 강조하는 오늘날에, 즉자적이지 않은 진짜 '나다운 삶'을 모색하는 데 바로 그런 별것 아닌 해결책이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까.(admireyuna9@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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