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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일 : 2025년 3월 25일

   하와이는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휴양지이다. 사시사철 따뜻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에 더해 풍부한 관광 인프라와 선진국의 사회 기반 시설을 갖추고 있기에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즐길 거리가 많으면서도 안전하고 편리한 곳이다. 필자 역시도 처음에는 그런 점에 끌려 하와이에 가게 되었고 몇 차례 드나들다가 아예 1년을 살아 보기로 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거주자가 되어 보니 여행자에게는 보이지 않던 하와이의 이모저모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늘 여름이라고 생각했던 하와이에도 나름의 사계절이 있었고 계절마다 피는 꽃과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달랐다. 그리고 하와이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미국 본토의 거리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언어 경관(linguistic landscape)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언어 경관은 공공장소에서 접하게 되는 도로 표지판이나 광고, 각종 게시물 등의 문자 사용 양상을 분석하는 언어학의 한 연구 분야이다.

   하와이의 언어 경관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와이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래 폴리네시아 계통의 원주민들이 왕국을 이루고 살았던 하와이는 1898년에 미국 영토로 합병되었고 반세기가 조금 지난 뒤인 1959년에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미국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하와이의 풍경은 빠르게 변화해 갔다. 원주민들이 낚시를 하던 해변에는 화려한 호텔들이 즐비하게 되었고 새로운 이주민들의 거주를 위해 곳곳에서 택지 개발이 이루어졌다. 도시의 풍경이 변해 가는 사이 하와이 원주민들은 주거지를 잃고 변두리로 밀려났고 영어가 공용어가 되며 하와이어는 소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와이키키 쇼핑몰 앞의 훌라쇼를 제외하면 하와이 생활에서 하와이인들의 풍습이나 문화를 접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이에 살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하와이어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일단 도로명을 비롯한 지명의 대부분이 하와이어로 되어 있다. 와이키키 일대의 주요 상점들은 ‘칼라카우아 거리’와 ‘쿠히오 거리’ 사이에 밀집해 있는데 ‘칼라카우아(Kal?kaua)’와 ‘쿠히오(K?hi?)’는 각각 하와이 왕국의 왕과 왕자의 이름이다. 필자가 방문학자로 근무했던 하와이대학교는 마노아 지역에 위치해 있는데 ‘마노아(M?noa)’는 ‘두껍다, 단단하다, 넓다, 깊다’를 뜻하는 하와이어이다. 깊은 계곡을 품고 있는 마노아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 또한 하와이의 건물 중에는 ‘할레 알로하’처럼 ‘할레(hale)’로 시작되는 이름이 많은데 이는 하와이어로 ‘집, 건물’을 뜻한다.

   지명뿐이 아니다. 하와이의 많은 화장실에서는 ‘와히네(Wahine)’, ‘카네(K?ne)’라고 쓴 것을 볼 수 있는데 각각 여자와 남자를 뜻한다. 그리고 음식점 메뉴판에서는 흔히 ‘푸푸스(P?p?s)’라고 표시된 음식들을 볼 수 있는데, ‘푸푸(p?p?)’는 본래 달팽이나 조개류를 뜻하는 하와이어이지만, 손으로 집어 먹을 수 있는 가벼운 스낵의 뜻으로도 쓰여 푸푸스 메뉴는 에피타이저로 이해하면 된다. 관광지나 큰 쇼핑몰에 가면 입장료나 주차 요금표에 ‘카마아이나(Kama‘?ina)’ 요금이 따로 있는 경우가 있는데 ‘카마아이나’는 하와이 주민을 뜻한다. 외국인이어도 하와이주의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으면 카마아이나 할인을 받을 수 있는데 할인율이 꽤 크다. 또한 하와이의 거리를 걷다 보면 ‘Da Spot’, ‘Da Kitchen’, ‘Da Seafood Store’처럼 ‘Da’라는 말이 붙은 간판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는 영어의 정관사 ‘the’를 하와이어식 발음으로 읽은 것이다. 한국어처럼 하와이어에도 영어의 ‘th’에 해당하는 [ð] 발음이 없기 때문에 이를 [d]로 발음하는 것이다. 필자가 자주 갔던 ‘Da Shop’은 하와이의 역사, 문화, 언어 등 하와이에 대한 책을 모아서 파는 작은 서점이었다.

   하와이의 언어 경관 중 필자의 눈길을 끈 또 다른 부분은 한식당 메뉴판의 ‘meat jun’이라는 음식명이었다. 궁금해서 시켜 보니 한국에서 먹던 육전이었다. 육전이 ‘meat jun’이 된 배경에는 하와이 이주 한인의 역사가 있다. 하와이에 한국인의 이주가 시작된 것은 1903년부터로, 초기 이민자들은 대부분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온 노동자들이었다. 플랜테이션 농장에는 여러 민족들이 고용되어 있었는데 민족별로 캠프를 이루고 살았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포르투갈인, 필리핀인 등 다국적 노동자들은 하와이어에 각국 언어가 뒤섞인 피진어로 서로 소통했다. 이들은 노동 현장에서 필요한 단어들을 공유하는 한편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상대 언어의 음식명을 배워 갔는데 한국의 육전을 타국 노동자들에게 설명할 때 ‘육(肉)’은 ‘meat’이라는 영어 단어로 번역했지만 ‘전’은 번역할 길이 없어 그대로 ‘jun’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와이 플랜테이션 빌리지에 보존되어 있는 한인 가옥     푸우이키 공동묘지(Pu?uiki Cemetery)의 미주 한인 이민
                                                                                                               백 주년 추모비

   과거 사탕수수 농장이 있던 지역에는 해당 농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묘지가 남아 있는데, 농장에서 같은 민족끼리 캠프를 이루고 살았던 것처럼 공동묘지에도 한인 구역, 일본인 구역, 필리핀인 구역 등이 나뉘어 있다. 한인들의 묘비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묘비명이 한자나 한글로 된 경우가 많지만 점차 영문으로 바뀌는 경향이 보이고, 한자, 한글, 영문을 병기한 경우도 적지 않다. 2021년 건국 훈장을 받은 김노디의 묘비에는 ‘NODIE KIMHAIKIM SOHN’이라는 영문과 함께 ‘노듸김해김손씨 지묘’라고 한글로 병기가 되어 있는데, 이름을 ‘노디’가 아닌 ‘노듸’로 적었다. 사망 연도가 1972년인데 당시 후손들이 현대식 표기법이 아닌 구식 표기법을 따랐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1950~1980년대에 돌아가신 다른 분들의 묘비에서도 ‘김복슌’, ‘젼병찬’, ‘리억실’과 같은 구식 표기법이 보였다. 하와이에 남아 있는 이민사 자료들을 살펴보면 20세기 중엽까지도 ‘ㅏ’ 대신 아래아(ㆍ)를 사용하거나 된소리를 적을 때 ‘ㅺ, ㅼ, ㅽ, ㅾ’을 사용하는 등 초기 이민자들이 한국을 떠날 당시의 표기법이 후대까지도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한인 묘비의 구식 표기는 하와이 한인 디아스포라에서는 틀린 표기가 아니라 표준적 표기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와이의 거리에서 마주쳤던 이러한 언어 경관들이 계속 마음에 남아 필자는 요즘 하와이 한인 신문 『국민보』(1913-1968)를 입력하고 분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학생들과 함께 100년 전 하와이 한인 신문을 읽어가며 태평양의 낙원에 깃든 이민자들의 희로애락과 그들이 만난 새로운 세계에 대해 배워 가고 있다.(anyele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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